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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하 Mar 18. 2023

나도 모르게 내가 참 많이 힘들었구나

여전히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면 남들과 똑같이 퇴근길 지옥철을 타고 돌아오는 것의 반복이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주말에 청소한 깨끗한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입었던 모든 것들을 세탁기에 넣고 개운한 샤워를 끝내면 그제야 하루의 마무리가 정말로 된 것을 느낀다. 이제 의자에 앉아있었던 시간만큼 침대에 누워있을 때다. 지금의 이 일이 너무나도 좋다. 적은 수입과 고용의 불안함은 촬영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안한 몸과 스트레스받지 않는 정신은 나에게 일하면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촬영 현장은 나에게 큰 고통이었다. 계획되지 않은 변수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그 모든 상황에 완벽하게 대처하는 것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곳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요구조건을 맞추지 못했을 때다. 어김없이 날아오는 쌍욕과 비판 없는 비난은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마저 후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현장 경험이라고 해도 중간에 마음대로 이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 속 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욕을 들으며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자존심 상했다. 크랭크업만을 기다리며 일을 나가는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참 볼품없었다. 나에게 현장에서 일했던 일 년의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어제 퇴근을 하고 집에 누워서 잠들기 전 음악을 들었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다음 날의 출근을 생각하게 되었다. 콜센터로 가는 길을 떠올리던 중 중간에 지나치는 여의도역을 지나치지 않고 멈춰버렸다. 그때 갑자기 심장이 뛰고 불안감이 덮쳤다. 분명 내일 출근하는 곳은 평화로운 콜센터라는 것을 머리는 잘 알고 있음에도 내 몸은 촬영장을 향해 달려갈 때의 기분이었다. 여의도역에 겨우 도착해서 스탭버스를 타고 촬영지로 가는 그 시간이 참 짧았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리기 직전에 매일 오늘은 또 어떤 욕을 먹고 어떻게 버틸까라는 생각이 가득했던 그때의 경험들이 어젯밤의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계속해서 맞다 보면 나도 모르게 타 있는 피부처럼 나의 마음도 강한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저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넘긴 것은 아닐까. 정말 좋아했던 일을 접어야 했던 마음이 여전히 미련으로 남아있다. 촬영이 끝나고 상영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기억이 되었음이 아쉽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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