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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Oct 22. 2019

뼈다. 인간의 뼈다. 그것이 나라는 존재의 이름.

뼈를 감싸고 있던 살 점들은 땅속의 존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양분이 되어 사라져 갔고

몸의 중심부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장기들 또한 마찬가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의 의식은 살점과 장기가 거의 사라졌을 즈음에 

신체를 소화해낸 결과물처럼 생겨났다.

하얗게 드러난 뼈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뼈를 곱게 감싼 부드러운 살점 위로 손목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시계(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재깍재깍 난다),

잘은 꽃무늬가 새겨진 붉은색 면 원피스, 다리에는 흡사 자동차 타이어 트레드를 연상시키는 무늬의

흰색 타이즈 그리고 이제는 흙 속에서 빛을 잃은 검은색 에나멜 구두. 이것이 나, 뼈라는 존재 이전에 

살아 숨 쉬던 존재의 유물들이다. 

키는 대략 130cm. 이 작은 존재는 어떤 일로 이토록 이른 시간에 나라는 존재로 변모되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살아 숨 쉬던 존재와 기억과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온전히 별개의 존재다. 

살아 숨 쉬던 존재의 유물들은 흙과 피로 더럽혀져 있지만 아직은 형태를 유지한 채로 남아있다. 

유물들은 의식이 없는듯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숨을 거둔 그 날 유물들의 숨도 같이 끊어진 것일까.

아니면 유물들에게는 처음부터 의식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일까. 

그다지 깊지 않은 흙구덩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로서 실제 하는 뼈의 존재와 

유물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유물들에게 의식이 있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간다.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의 기준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르는지는 모른다. 

다만 붉은색 원피스의 조직이 조금은 느슨해졌고 나의 실체, 

뼈의 단단함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마침 분홍색 플라스틱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멈추었다. 

분홍색 플라스틱 시계는 내가 의식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형적인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제는 멈추었을 뿐이다. 

흰색 타이즈는 이제 흙에 물들어 흰색이라고 말하기 무색할 지경이 되었고,

검은색 에나멜 구두는 여전히 빛을 잃은 채로 침묵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땅 위의 소리는 선명하게 그리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수도 없이 내리던 비, 빗소리라는 것은 가까워질수록 생동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의 실체, 뼈가 단단함을 잃어감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실체를 잃었을 때에 의식 또한 사라지는 것일까.

불안함은 없었다. 아마도 나 다음의 존재가 또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 그것뿐이었다.

빗소리다. 

빗물에 흙이 씻겨 나간 이유에서인지 빗소리가 선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빗소리뿐만이 아니다. 

숨 쉬는 존재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다수 들려온다.

굉장히 많은 수의 숨 쉬는 존재들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말소리와 발소리다.

울음소리도 작게 들렸다. 

무슨 일일까. 땅 위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뼈만 남은 손을 들어 흔들어 볼 수도 없다.

그저 뼈라는 실체가 나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외침, 발소리가 이어졌고 몇몇의 숨 쉬는 존재가 이쪽으로 왔다.

소리가 난다. 흙을 파내는 소리다. 이렇게 되면 나를 덮은 몇 안 남은 흙이 사라진다.

숨 쉬는 존재의 호흡이 가빠진다. 덩달아 그 존재의 영혼의 맥박마저 느껴졌다.

그때, 깊숙이 흙을 파고든 것은 숨 쉬는 존재의 힘이 깃든 삽, 

그것은 붉은색 원피스를 가볍게 찢고 허벅다리 뼈를 관통했다. 

순간 삽이 움직임을 멈추었고, 숨 쉬는 존재의 외침이 선명하게 들렸다. 

"여기 뼈가 있습니다!"

수많은 존재의 발소리가 내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몇 개의 삽이 더해져 나를 덮고 있던 흙을 거두어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를 덮고 있던 흙이 제법 거두어졌다. 

멈추지 않고 내리던 빗방울은 이제 흙이 아닌 내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숨 쉬는 존재들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고 울음소리도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실체가 흙 위로 올라와 빗방울을 맞이하고 있다. 

흙이 빗방울에 씻겨나가자 나의 실체, 뼈가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나의 실체 전체가 흙 위로 드러나 빗방울을 피함 없이 맞았다.

나의 의식은 그 어느 때 보다 선명해졌고 무엇인가 큰 변화가 올 것만 같았다.

멀리서 들렸던 울음소리가 이제 곧 내 앞이다. 

울음을 멈추지 않던 숨 쉬는 존재는 내 위로 걸쳐진 분홍색 플라스틱 시계, 붉은색 원피스, 흰색 타이즈,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한눈에 확인하고는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울었다.

이제 내 위로 떨어지는 것은 빗방울뿐만이 아닌 숨 쉬는 존재의 뜨거운 입김과 눈물이었다.

눈물은 빗방울과는 다르게 따스했다.

빗방울은 내 의식을 선명하게 해 주었지만, 그 존재의 따스한 눈물은 나를 잠들게 했다. 

눈물은 내 위로 계속 떨어졌고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잠들었다.

잠드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다음은 무엇일까 생각했으며, 다시 빛을 찾은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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