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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Jan 08. 2023

생각만큼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배드민턴의 기쁨과 슬픔




배드민턴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됐다.

갑자기 사무실에 불어닥친 배드민턴 열풍에 가장 앞장서서 분위기를 주도할 정도로 거의 반미 쳐 민턴에 빠져버렸다.


약 10여 년 전,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30대 초반 무렵, 사뿐사뿐 리듬감 있는 스텝에 이은 날렵한 점프, 상대코트에 강 스매싱으로 내리꽂는 배드민턴에 반해 바로 동호회에 가입하고 레슨까지 받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고 기본적인 하이클리어(길게 샷을 날리는 기술로 초보자들이 처음 배우는 기술) 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다 코치는 레슨 때마다 답답하다며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어느 날 레슨을 받다 눈물이 핑 돌정도의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라켓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단 2달 만에 배드민턴에 대한 나의 로망이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불혹을 훌쩍 넘긴 지금 배드민턴이 다시 찾아왔다. 그간 마음 한구석에 배드민턴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좀처럼 기회를 찾지 못했고, 과거 아픈 기억으로 섣불리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친목도모를 위해 자체 배드민턴 대회를 열었는데, 직원들이 한순간에 배드민턴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더구나 동료직원 중 배드민턴 10년 경력에 최고등급인 A조 실력을 갖춘 여직원이 있어 우리는 더 쉽게 배드민턴에 빠져들어갔다.


사무실 동료들과는 점심시간에 배드민턴을 쳤다. 저녁에는 클럽에 나갔고 주말에는 레슨을 받으며 게임을 즐겼다. 일주일에 적어도 4-5일 정도는 배드민턴을 쳤다. 중독성이 강했다. 사무실에도 배드민턴 라켓을 갖다 놓고 틈나는 대로 스윙 연습을 했고 유튜브는 배드민턴 영상만 보고 있었다.


배드민턴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 배우면 배울수록 세심한 기술을 요하고 어느 정도 실력을 올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스포츠다.


가로 6.1미터, 세로 13.4미터의 코트를 반으로 나누어 중앙에 있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셔틀콕을 상대편으로 넘기면 이기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에 반해 운동량은 어마어마하다. 빠르게 날아오는 셔틀콕을 받아내기 위해 손목, 무릎, 발목 등 몸의 뼈들을 이어주는 관절 대부분사용하는 매우 활동적인 운동으로 그만큼 부상도 많다.


3달 정도 지났을까?


무릎에 이상신호가 왔다. 운동할 때는 아프지 않았는데 운동을 끝내고 나면 미세하게 찌릿거렸다. 무릎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움직임이 있거나,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무릎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관절과 근육 부상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운동에 빠진 사람이 운동을 안 하기는 쉽지 않다. 머릿속엔 온통 배드민턴뿐이었고 임시방편으로 보호대를 차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 나는 마흔을 훌쩍 넘겼고 아이 둘을 낳았다. 노화는 이미 진행 중, 뼈는 삭고 근육은 소실되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단 3달 만에 몸에서 신호가 와버렸다. 너무 서러웠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키웠고 결혼 후 이제야 제대로 된 취미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무릎이 아파오다니... 이러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운동을 다시는 못할 수도 있었다.


네이버와 배드민턴 커뮤니티 카페에서 무통증, 배드민턴 부상 등을 검색해 가며 각종 정보를 훑기 시작했다. 슬개건염, 퇴사두건염, 골관절염.. 무시무시한 진단명들이 검색됐다. 관절과 근육 부상은 반드시 조기에 치료를 시작해야 하며 시기를 놓치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운동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고 했다.


네이버 카페에 '무릎연골은 지우개와 같아서 재생불가다, 민턴에 미쳐서 3년간 무리하다 결국 수술을 한다, 근육이 약해서 그러니 근력운동을 병행해라' 등 무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중 가장 끔찍했던 이야기는 운동을 2달, 길게는 6개월까지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나는 왜 이리도 운이 없을까

같이 시작한 동료들 모두 멀쩡한데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일까, 진작에 근력운동 좀 해둘걸, 열정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이 몸뚱이가 왜 이리 처량하고 억울한지...


한의사인 친구는 40대에 운동을 시작했다면 안 아픈 게 더 이상한 거라며, 꼭 배드민턴을 해야겠냐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요가나 필라테스를 하라고 했다.


하루의 기쁨이자 설렘, 일상의 활력소가 돼준 나의 배드민턴을 두 달을 쉬어야 한다니..

온 세상의 슬픔과 불행이 나에게 오는 기분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이었지만 내 무릎에 대한 진단은 이미 끝났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병명과 치료법, 예방법까지 알 수 있으니 이제 병원에 가서 확인만 하면 된다. 열감이 느껴지니 염증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병명을 알고 나니 계단을 오르거나 무릎에 힘이 가해질 때마다 통증은 더한 것 같았다.


뼈나 근육은 엑스라이만으로는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하다. 비용이 들더라도 MRI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 무릎을 여기저기 눌러보시며 통증이 있는지 확인했고 운동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이전에 운동을 했었는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하얗게 뼈가 드러난 엑스레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셨다.


'아... 운동을 못할 것 같다고 하면 어떡하지? 1,2달도 아니고 더 오래 쉬어야 한다고 하면 어떡하나?'


말기암환자가 살 수 있는 날이 얼마인지 기다리는 것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의사 선생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엑스레이 상으로는 관절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이고 염증도 심한 것 같진 않습니다. 지금 환자분의 증상은 운동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초기 증상이에요, 운동량에 비해서 가지고 있는 근육량이 적어 버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일단 심하지 않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나는 내 무릎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자칫 잘못했다 무릎이 아예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MRI를 찍어보자고는 하지 않으셨다.


" 운동을 계속해도 될까요? 운동을 오래 하기 위해서 정확한 제 상태를 알고 싶습니다 "


나의 절실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MRI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요즘 MRI에 보험이 적용되면서 환자들이 무분별하게 MRI를 찍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단 내 무릎의 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했다.


"환자분은 보다 정확한 진단을 원하시는 거죠? 그럼 MRI를 찍어 보시겠어요?"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자기 공명영상(MRI) 촬영을 했다. 무릎 한쪽에 40만 원, 양쪽 다 찍으면 80만 원이었다. 보험이 적용되긴 했지만 30%는 자부담이었다. 통증이 더 심한 오른쪽만 찍기로 했다.


MRI결과지를 들고 의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처음 진단했던 대로 염증이 심하지 않으니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 선생님 그럼 운동은 쉬어야 하겠죠?"

" 아니요, 그냥 살살하시면 됩니다"

"네? 운동을 해도 된다고요?"

" 네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시간과 횟수만 조금 줄이세요,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실 수 있으세요?"


의사 선생님은 나 같은 환자를 수백 명도 더 봤을 것이고 특히 배드민턴 치는 환자들은 오래 쉬지 못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근데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운동을 끊을 정도로 내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와, 운동을 쉬지 않아도 된다니, 진짜 운동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일주일 동안 약을 먹었고 의사 선생님 말대로 운동을 계속했다. 아프다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론 운동을 쉬기는커녕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염증이 심하지 않다는 진단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무릎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을 더 많이 하고 강도도 세졌지만 무릎은 멀쩡하게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나는 무릎 보호대조차 차지 않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랏? 멀쩡하네?


순간 헛웃음이 나오며 그동안 괴로워하고 억울해하던 내 모습이 생각나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동안 내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외부상황에 대한 지나친 해석으로 내면의 전투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은 인간 심리의 흔한 측면이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 노랑 앵무새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눈을 감자마자 노랑 앵무새를 떠올릴 것이다. 그 생각은 차츰 강박적이 되어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심지어 꿈속에서도 노랑 앵무새가 나타날 것이다. 그 새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P27)-


의사 선생님의 말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운동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며칠 약 복용으로 치료가 가능, 운동을 계속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상태' = 그렇게 겁먹을 필요가 없는, 운동을 안 하다 갑자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그 흔한 근육통, 염좌 정도였던 것이다.


미세한 무릎통증은 내 마음속 노랑앵무새로 자리 잡았고 점차 강박이 되어 모든 신호를 무릎통증과 연결시켜 점차 키워가고 있었다. 노랑앵무새는 몸집을 키워가며 불안, 두려움, 우울감, 후회, 자괴감으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노랑 앵무새는 내면의 전투를 치르며 괴물로 변해있었고, 나는 내가 키워낸 그 괴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억울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의 눈송이들이 쌓여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눈덩이를 만들어 버렸다. 거대한 눈덩이는 실체가 없는, 나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과 허상이었다.


'그것을 큰일로 만들지 말라'는 류시화 작가님의 말대로

무릎에 통증이 온 것은 확실히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을 괴물로 만들어 나를 괴롭힌 것은 나의 생각들이었다.


생각만큼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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