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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에세이문학> 2024년 겨울호. 신작 원고

by 윤슬log


“한국에 와서 처음 한강을 봤을 때 내가 진짜 한국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고향같이 편안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재일교포 2세인 유미씨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은 그녀는 이름도, 얼굴도, 성격도 모두 일본인보다는 한국인 쪽에 가까웠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한국의 친척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국어를 배운다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아! 내가 정말 한국인이구나!’ 하고 느끼게 한 것이 입맛에 맞는 김치도, 한국 친구들과의 끈끈한 우정도 아닌 그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이었다니...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강은 어머니의 넉넉한 품이요 젖줄인 동시에 마음의 고향으로 한국을 그리워하는 재외동포들에게는 노스탤지어의 표상이다. 어떠한 유물이나 유적 못지않게 가장 한국적인 곳, 대한민국의 상징인 한강. 그 한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




몇 해 전 여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늘 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웅장한 건축물들,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 등 하나같이 이국적인 경험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느 나라든 도시를 관통하는 깨끗하고 맑은 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강들 역시 우리나라의 한강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영국의 명물 템스강과 이름만으로도 왠지 낭만적인 프랑스의 센강, 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독일의 라인강과 스위스의 아름다운 레만호까지... 한눈에 쉬이 들어오는 강폭 때문인지 한강처럼 장엄하고 도도한 맛은 없었지만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강가를 가득 메우고 있어 언제나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강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명성을 넘어 이곳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장소이기 이전에 그 나라 사람들이 앞장서 아끼고 보호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물론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국 고유의 멋을 간직한 채 역사적 아픔, 국민들의 기쁨과 눈물을 모두 담고 흘렀지만 때로는 잊히기도 그 소중함이 퇴색되기도, 심지어는 심각하게 오염된 적도 있었다. 주로 무한한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단계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담수어가 뛰놀던 템즈강은 심각한 오염으로 ‘죽음의 강’이라고 불리었고, 라인강 역시 산업의 발달과 인구 증가에 따른 오염으로 ‘라인강의 기적’이 있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회복 불능 수준의 환경파괴에도 불구하고 청정무구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염을 인식하고 국민과 정부가 기울였던 다각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산업폐수 규제를 강화하고 민관이 합동으로 생태계 복원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시민들 역시 정부의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50년대 합성세제 사용급증으로 호수의 오염이 극에 달했던 스위스는 레만호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20년에 걸쳐 120여 개의 폐수처리장을 건설하였고, 호수 경관의 보전을 위해 관광대국이 된 지금까지도 ‘몽블랑 다리’ 하나만을 건설하여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한강을 관통하는 다리가 20개도 훌쩍 넘는 우리와는 실로 대조적인 현실이다. 이처럼 이들 나라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은 작은 편익에 급급하기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자연의 든든한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유럽의 어느 곳 못지않은 금수강산을 자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할뿐더러 철마다 바뀌는 계절의 색깔도 조화롭기 그지없다.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우뚝 솟은 산과 한강 물의 향연을 볼 수 있고,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야말로 ‘푸른 산 맑은 물’의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다.


가족과 함께 바람을 쐬러 자주 가는 장소 중에 양수리 ‘두물머리’라는 곳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시작되는 곳으로 한강의 상류 부분에 해당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가 서로 만나 한 곳을 향해 하염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갖가지 상념에 잠기기도, 넋을 놓아버린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울의 중심에서 항상 보아오던 바로 ‘그’ 한강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늘 감회가 새로워진다. 비가 내린 날에는 두 강물의 색깔이 완연히 다른 검푸른 색과 황톳빛을 띠며 한데 어우러져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척 신비롭다. 같은 자리에서 얕은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강은 끊임없이 시작되고 흘러가며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강은 지난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의 모든 정서를 담고 흘러온 동반자와 같은 강이다. 비록 라인강과 같은 수많은 전설로 포장되지 않고, 레만호와 같은 에메랄드빛 화사함도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끌어안고 보듬으며 묵묵히 흐르고 있는 한민족의 보금자리다.


오늘도 한강은 우리네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보다 푸르고 맑아질 날을 기약하며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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