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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인생의 네 가지 기둥

오래전 회사를 그만두면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자주 아프다 보니 한번 사는 인생. 꼭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내 인생을 지지하는 네 가지 큰 기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갑자기 불어난 시간과 여유들을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쏟고 싶었다. 의욕이 넘쳐도 약한 체력을 감안한다면 선택과 집중이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책과 글쓰기>, <여행>, <신앙> 그리고 <봉사>

이렇게 네 가지 키워드가 떠올랐다.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는 <글쓰기>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워낙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꾸준히 해왔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예부로 활동하며 습작을 이어왔고 좋은 글들은 필사노트에 적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속초에서 지내는 동안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문예지로 등단도 하고, 수기 공모전과 백일장에서 받은 상금들을 모아 가고 싶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글쓰기는 나에게 부담 없이 즐거운 유희이자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기도 하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


두 번째로 떠오른 건 <여행>

여행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중학교 때부터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국내외 출장으로 이곳저곳 다닐 기회가 있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치병을 하면서 여행의 기회가 생각처럼 자주 오지 않았다. 여건이 되는대로 당일치기 국내 여행을 하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은 '여행하지 않는 날들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여행지를 택하고 숙소를 예약하면서 그날을 기다린다. 어디에 들를지,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여행이 끝나면 사진과 추억을 되새기며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것. 이것이야말로 여행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세 번째 키워드는 <신앙>이다.

성당에 다니는 부모님을 따라 동생과 나는 자연스럽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일 미사만 참여하다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청년 활동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들 덕분에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했다. 성당에서 하는 캠프와 피정, 강연, 음악회, 성지순례, 북토크 등 각종 행사들은 가톨릭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열심히 활동하면서 신앙의 토대를 다진 것이 암투병을 하면서도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다섯 번의 유방암 수술과 한 번의 폐암 수술을 받았다. 유방 수술은 떼어낸 조직에서 추가로 암이 발견되어 퇴원한 지 일주일 만에 재수술을 한 것도 두 번이나 되었다. 도합 일곱 번의 전신마취를 했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지금은 호르몬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많은 일들을 겪으며 신앙은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커다란 닻이 되었다. 때로는 감당 안 되는 현실에 하느님을 원망하고, 신에게 분노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그분의 큰 뜻에 순명하며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


<봉사활동>의 경우 직장을 다니며 정기 후원만 하는 정도였는데, 퇴사하면서 몸으로 하는 진짜 봉사를 해보고 싶어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해보았다.

먼저 대학생 때 따놓은 교직이수 자격증을 활용해 학습봉사를 시작했다. 소아암 청소년을 위한 학습 봉사와 시각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습 지도를 꾸준히 했었다.

개인적으로 기념하고 싶은 날에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독거노인분들과 함께하는 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당 청년단체의 일원으로 장애인 시설로의 봉사도 열심히였는데 코로나 이후로 방문이 어려워 지금은 가지 못하고 있다. 늘 마음은 있었지만 실천이 어려웠던 것 같다.


나도 힘든 부분이 있지만 눈이 안보이거나 신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분들과 시간을 보내며

'내 상처가 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안타까운 일'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돼서 돕는 것이 아니라 도우면서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봉사'가 아닐까 싶다.




한때 인생이 너무 힘들어 '사주팔자'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사주(四柱)'란 인생을 지탱하는 네 가지 기둥이라고 한다. 호락호락한 학문이 아니어서 조금 공부하다 금방 그만두었지만, '내 삶을 지지하는 네 가지 기둥'이라는 말은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다.

타고난 생년, 월, 일, 시는 바꿀 수 없지만 내 삶을 받쳐주는 네 가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가혹하고 답답한 현실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인생을 이끌어 나갈 네 가지 무기를 생각해 보자.

삶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들, 나의 가치관과 잘 맞고 내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들로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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