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내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백년해로'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부부가 되어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고 즐겁게 함께 늙음>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나에게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 준다고 한다면, 나의 반려인 남편과 건강하게 백년해로하고 싶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속초에서 만났다.
나는 큰 수술 이후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고, 남편은 군복무 대체 근무를 위해 속초에 와있었다.
그를 처음 본 곳은 '독서 모임'이었다. 속초에서의 항암치료 기간 동안 온 동네 고양이와 강아지, 다람쥐와 각종 조류들을 친구 삼아 지냈지만 치료가 끝나고 컨디션이 돌아오자 기동력이 생겼다. 문득 내 또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 없이 오래 할 수 있는 모임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독서 모임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글을 쓰는 것.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에게 전혀 스트레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시작하게 된 독서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모임이 좋았던 이유는 나눔 중에 사용하는 닉네임 외에 나이, 직업, 회사, 출신학교, 고향 등 아무것도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모임을 하면서도 그 흔한 회식자리조차 없었다. 정해진 책 내용에 충실하게 이야기 나누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흘러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고 내가 나오지 않자 남편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 아는 사이였지만 정작 서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우리는 오랜 대화 속에 공통점을 발견해 가며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내가 근무하던 직장이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였는데, 남편이 그 학교의 학생이었고 심지어 바로 옆 건물 단과대학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항상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한두 번은 분명 스쳐 지났을 사이였다. 이밖에도 책과 글을 사랑한다는 점, 여행을 좋아하고, 속초의 자연에 반해 이곳에 정착했다는 점, 취향이나 식성까지 아주 잘 맞았다.
그와 인연이 무르익으면서 한편으로 나의 불안감도 커져갔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나의 병에 대하여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도 상처가 적고 그에게도 선택권을 줄 수 있으니까. 세 번 정도 만났을 때 나는 속으로 몹시 떨렸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서울을 떠나 속초로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어떤 병으로 어떻게 치료받았고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다는 나의 말에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의학이 너무 발전해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다 잡아내요. 어쩌면 우리가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만약에 지금 제가 정밀 검진을 받는다면 저도 무언가 나올 수있을걸요. 그 분야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사람으로서 암은 반드시 정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는 지금도 서로 존댓말을 쓰는데,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흔들림 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이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오늘 이야기한 이 이유로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듬직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교제하는 4년이라는 시간 내내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켰고 재발로 인한 수술과 치료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가끔 남편이 결혼식 때 읽어주었던 편지가 떠오른다. 연애적부터 하던 말인데, 본인이 쌓은 선업(善業)이 모두 나에게로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나를 위해 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올바르게 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남편의 그 따뜻한 마음이 늘 고맙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채 속초로 내려갔지만 가장 바라던 사랑을 만났고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우리를 닮은 예쁜 아이가 찾아왔으면,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사실 지금도 바라는 바는 많지만 그래도 남편 옆에 누울 때면 나의 기도는 늘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하느님, 이 사람 옆에서 이렇게 자는 모습 평생 보게 해 주세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에 뜨끔하다가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기에 후회는 없다.
오늘도 남편이 돌아오면 함께 먹을 저녁상을 준비한다.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운다. 그는 잘 차려진 밥을 뚝딱 먹고 쌍따봉을 날릴 것이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