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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여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그때의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나는 스스로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큰일이 닥쳐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땐 사실 너무 어려서 어떤 병인지 잘 몰랐고, 씩씩하게 이겨내면 되는 줄만 알았다.

8년 만에 재발했을 때에도 다소간에 짜증은 났으나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괜찮은 직장도 있었고, 썸을 타던 사람도 있었고, 한 번 해봤는데 괜찮았으니까 이번에도 금방 치료하고 사회로 복귀하면 되지 싶었다.


버틸만해서였을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었다. 결국 큰 수술 끝에 속초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퇴직 후 마음속 꿈을 좇아 이어가던 학업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경우 특이하게 국소 재발만 계속되고 있어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었는데, 이전에 썼던 약을 20% 정도 증량해 사용하는 공격적인 치료를 했던 때가 가장 힘들었다. 수술 이후 12번 주사를 맞았고 원래 예정된 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중간에 부작용이 심해 치료가 한동안 중단되었다. 극심한 하혈이 계속되어 말도 어눌해지고 눈동자가 다 풀려 내가 내가 아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교수님께 큰맘 먹고

"항암치료를 중단하겠다!"

고 선언을 했었다. 물론 나의 외침은

"아니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제 와서 치료를 안 한다고 하느냐. 내가 이 병원에서 수천수만 명의 환자를 봐왔는데, 이렇게 많이 수술하고 이렇게 많이 치료한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너밖에 ."

라는 말을 듣고 짜게 식긴 했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수님의 그 말에 없었던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실로 나는 엄청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꾸 아프다고 위축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큰 병도 꿋꿋이 잘 이겨내고 있는 진정한 '서바이버'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료는 재개되었지만 힘든 건 똑같았다. 이 항암제는 4번, 6번이었 일전의 치료와 달리 기간이 유난히 길어 지긋지긋하게 나의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코로나 시국과 맞물려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여러 가지 제약이 훨씬 더 많아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자유롭고 푸른 속초에 있다가 서울 시내 한복판으로 돌아와 꽉 막힌 도시에 갇혀버린 느낌이랄까. 초원의 망아지 마냥 산에서 뛰어놀고 바다를 달리며 살았는데, 높은 첨탑에 갇혀 창 밖만 바라보는 신세였다. 그것도 아주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삶이 막막하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힘든 치료를 해도 계속 재발이 되니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잠드는 순간에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던 적도 있었다. 눈 감고 계속 잘 수 있다면 깨어나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해는 떠오르고 어김없이 아침이 왔다.


그 시절 제일 괴로웠던 건 아침에 학교 가는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우리 동네는 아파트를 가로질러야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단지 구조가 원형으로 되어있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건물을 타고 올라왔다. 날이 밝아오고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으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들은 오늘도 학교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배울 텐데,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마음을 제일 힘들게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던 후배가 학교를 그만두고 세계여행 떠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번 사직서를 내면 임용고시를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미련 없이 그만 둘 생각을 했냐는 물음에 그녀는

"저 아이들은 이제 덧셈 뺄셈을 배우고 다음주면 곱셈을 배울 텐데. 나는 새롭게 배울만한 것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거였다. 그 생각이 바로 배낭을 챙겨 과감히 떠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멋있고 인상적이었는지. 새로움은 고사하고

'나는 이렇게 아프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싶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유쾌한 소음도 모두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넉넉히 남은 시간도, 전도유망한 미래도 모두 내 몫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아침이 오는 것이 제일 슬펐던 시간을 지나 기적처럼 세월은 갔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다.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지방의 한 소도시로 우리나라에서 출산율 1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킬 때면 학교 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중학교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라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서 공 차는 소리,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등교할 때 들리는 안내 방송 소리도 들려왔다.


이따금 "와아~~"하는 큰 함성 소리에 놀라 창문으로 뛰어가면 피구나 축구 경기 응원을 하며 열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재밌어 한참을 구경하기도 했다.

'맞아. 아이들 소리가 나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이랬어. 생기도 돌고.'

어디서 들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신기한 건 똑같은 아이들 소음을 들으면서 느끼는 나의 마음이 불과 몇 년 전과는 정반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는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너무 싫고 괴로웠는데, 지금은 하루의 시작을 신나게 해주는 없으면 허전한 소리가 되었다.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여 힘든 건 금방 잊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진다.


내일 아침도 남편이 출근하면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하고 청소기를 돌릴 것이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학교에 가고 나도 힘차게 나의 일과를 시작하겠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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