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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가족

'다행인 일'을 찾아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이었다. 우리 가족은 화목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똘똘 뭉쳐서 해결해 나가곤 했다. 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주로 나의 '암 치료'를 말한다.


2014년 가을. 8년 만에 암이라는 녀석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였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거실로 나가는데, 방문 앞에 아버지가 서계셨다. 나는 아빠를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고 엄마와 동생까지 넷이 부둥켜안고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1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푸른 새벽의 그 모습이 생생하다.




아빠는 치료기간 동안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들을 지원해 주셨다. 항암 주사는 보통 3주 사이클로 돌아갔고, 약 기운이 도는 첫째 주가 지나면 남은 기간은 체력이 조금 회복되곤 했다. 아버지의 배려로 컨디션이 좋아지면 2박 3일 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어머니와 함께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다.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폐 수술 이후 갑자기 속초행을 결정한 나의 선택을 지지해 준 것도 아버지였다. 어머니와 나는 속초에, 출근을 해야 하는 동생과 아빠는 서울에 남게 되었다. 갑자기 시작된 두 집 살림에 우리 집 두 남자는 꽤나 긴 적응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하루는 몇 달 만에 본 아버지 배가 남산만 해져 있어 어머니께 여쭤보니 요리가 서툰 아빠가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면서 생활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는 것이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 사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던 때였다고 애써 변명을 해본다.  


남동생에게는 무엇보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돌아보면 동생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내가 아팠다. 고3 때, 취업 준비할 때, 결혼준비할 때, 조카가 태어났을 때에도 나는 치료 중이었다. 아플 때를 고를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 오래 아픈 환자를 보는 가족들의 마음도 분명 힘들 것이다. 

동생은 항암 치료 내내 빡빡 깎은 리로 문신처럼 운동복만 입고 다니는 나에게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도 사 입으라" 용돈도 주고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엄마는 나의 투병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한 사람이다. 특히 속초에서 전업 치병을 하는 4년 동안 삼시세끼 제철 재료로 건강밥상을 차려주셨고, 걷거나 산을 오르는 재활을 할 때도 늘 함께했다. 가족이 다 그렇겠지만 엄마는 나의 병을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셨다.  

"애를 뭘 먹였길래 어린 나이에 암에 걸렸냐. 안 그래도 너네 가족이 외식을 자주 하는 것 같더라."

와 같은 사람들의 말에 누구보다 상심이 큰 엄마였다. 자식이 아픈 것을 자신의 죄로, 본인 책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한 번은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울적해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의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큰 귤 옆에 작은 귤이 놓여 있는 사진이었다.

"엄마 귤, 이나 귤. 우리 오래오래 함께 하자."

외출 중이던 나는 그 문자를 받고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난데,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다른 가족들은 또 어떨지...'





우리는 자주 이 과정을 반복했다. 늘 내가 아픈 입장이라 다른 가족들의 입장이나 심정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픈 딸을 가진 부모의 마음은 어떨지, 큰 병에 걸린 누나가 있는 동생의 심정은 어떠한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마 가족들이 없었다면 이만큼 건강해진 모습도 없을 것이다.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남들보다 자리 잡고 안정된 삶을 찾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해서 부모님께는 자랑스러운 , 동생에게는 든든한 누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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