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내 삶엔 나의 기억보다 더 짙은 흔적을 남기고 간 누군가가 있었다.
나의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같이 만들어준 이가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것은 고작 서른둘이었다.
저 멀리 타국에서 들려온 친구의 부고는 당시 흔들리고 있던 내 삶에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떤 빛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함께한 지난 20년 정도의 시간이 내 삶에서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중학생 때는 그 나이대의 고민을, 고등학생 때는 또 그 나이대의 고민을, 대학교를 다니고 사회인이 되기까지는 또 그 나이대의 고민과 삶의 무게를 밤늦은 시간까지 서로의 집 앞을 몇 번이나 데려다주면서 나누던 우리였다.
서로에게 했던 좋은 질문과 대화들이 아직도 떠오른다.
우리에게는 늘 그런 좋은 대화들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만 삶에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은 우리에게 늘 더 깊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친구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호주로 떠났다.
이곳에서의 그 어떤 프로그램처럼 만들어져 있는 삶의 틀이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호주에서 원하던 삶을 살아가는 듯했던 친구가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면서 과거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내가 결혼했던 서른 즈음이었다. 그 시기 친구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내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도저히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오래 사귄 연인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후에는 행복한 신혼생활 중이었다.
내 삶에 결혼이란 단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내게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 결혼은 암에 걸리신 아버지가 스물일곱에 내 곁을 떠나고 수험생인 동생과 너무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되신 어머니를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내가 책임을 져야 되는 상황에서 온전히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의 결심에서 이뤄진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복이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행복한 신혼을 한창 보내고 있는 내게,
내가 결혼 준비하던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한껏 움츠려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친구의 말 못 할 힘듦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저 그의 마음을 들어주고 싶었다.
친구는 내게 SNS에 올라오는 나의 행복이 삶에서 가장 어둡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널을 오롯이 홀로 걷고 있던 자신에게 그 터널의 어둠이 더 짙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 비참했고 친구인 나에게도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지금은 괜찮다며 그때 혹시 자신의 축하에 서운함이 있었다면 미안하다고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타국에서 전해준 그의 축하에 오히려 감동받았던 나였다.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조차 안 되는 친구가 되려 나를 위하는 마음에 나의 행복을 굳이 자랑했었던 지난날들이 너무 부끄러웠다. 사람들이 많은 저녁시간 카페에서 꽤 긴 시간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둘 사이 그 침묵조차 우리에게는 좋은 대화였다.
그 이후로 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듬해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친구와 기억나는 대화는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
그날 이후로 행복할 것만 같았던 내 삶에도 시련은 여전히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견디느라 서로의 안부를 아주 가끔 물었다. 그 안부조차 뜸해지던 때에 들려온 그의 부고는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터널을 걷고 있던 내게 지난 나의 행복에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했다는 친구의 미안한 축하였던 것 같다. 넌 이제 곧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나오게 될 거라는 그런 응원이 담긴 축하.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되려 나의 살아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 질문은 이제 내 삶에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친구의 흔적이 되었다.
지금 내 삶이, 그리고 나의 글이 친구의 질문에 좋은 대답이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보고 싶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