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과정이 중요하다
그림 그리는 전의 과정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날카롭게 감각의 날을 세운 후 느껴지는 것을 마음에 담아야 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기 힘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큰 빵이지만 속이 비어있는 공갈빵처럼 밖에서 볼 때는 ‘그림’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지만 나는 안다. 마음이 들어가지 않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그렇다고 매번 깊이 생각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깊은 생각은 세상의 수많은 상처를 볼 수 있게 했다. 마주하게 된 상처는 계속해서 자신을 점검하게 했고 한 곳에만 머무르게 했다. 한 발자국 더 걷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휴식을 통한 비움이 필요했다.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휴식을 즐기려 했다. 아이 셋 엄마인 나에게 휴식은 산책과 여행이다. 휴식 시간에는 콜라주, 라인 드로잉,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캔버스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재료와 선의 합은 살맛 나는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있다. 나에게 살맛 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다음 그림도 그릴 수 있겠구나.’하는 안도감과 ‘한번 다시 그려보자.’라는 용기를 얻어 주어진 하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명한 화가도 아니고 글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다. 그림의 영향력이 있는 것도 글이 깊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원한다. 작고 작은 나의 그림과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 따뜻함, 풍요로움을 줄 수 있기를. 힘든 인생길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그림이 되기를. 그림에 담아놓은 시선으로 함께 세상을 바라보기를.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이 아닌 자신만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길. 삶을 견디는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원한다.
타인에게 위로를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위로받기 위해 붓을 들었다. 스케치하고 채색한 후 액자에 넣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그림 그리기 과정이다. 하지만 실제 과정은 만만치 않다. 만만치 않은 과정이지만 묵묵히 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성취감과 환희에 찬 감정을 느끼기 힘들지만 그림을 완성한 후에는 이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우울과 무감각을 경계해야 하는 나에게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행복의 감정을 주는 것이 그림이 될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 돈, 명예를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통해 작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울, 좌절, 슬픔, 분노가 순간을 망치고 하루를 견디기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행복의 시작점이 그림이 되었고 지금도 그림과 함께 지내고 있다. 내일도 애매한 그림을 그리는 인생이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끝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삶의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에서 만난 그림을 위해 또다시 감각의 날을 세운다. 하루 중 오전 11시의 빛을 가장 좋아한다. 맑고 밝은 빛이 거실을 채운다. 빛으로 가득해진 거실을 보며 미소를 지어본다. 그리고 말한다.
‘방수진, 다시 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