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에 남편과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식사 후 카페에 잠시 앉아 차를 마시다 집에 돌아왔다.
한 참뒤 나는 카페에 아끼는 가디건을 두고 온 걸 알게 되었다. 상호명을 검색해 전화를 거니 가디건을 카페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찾으러 오라 했고 나는 안심했다. 당장 가지 못하는 형편이 있었기에 직원에게 문 닫기 전 가겠다고 했다.
카페가 문 닫는 시간은 밤 10시 반이었고 부모님이 부탁한 일을 (두 분이 가고 싶은 여행지가 생겨 급히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표 예매 등 이런저런 일을 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은 것이다. 카페까지 가는데 빠른 걸음으로 가도 10분쯤 걸리니 곧 출발하지 않으면 오늘 내로 찾지 못할 터였다. "내일 가."라는 남편의 말에 그냥 내일 갈까 하는 유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늦게 찾아가면 민폐가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번뜩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향해 집을 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습도가 높은 밤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니 직원은 매장을 정리하고 있었고 내 검정 가디건이 카운터 위에 놓여 있다. 내가 오늘 찾지 않았다면 그 가디건이 직원들을 분명 신경 쓰게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빨리 주인이 안 찾아가도 보관에 곤란 할 테고 혹시 북새통(직원도 많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카페임)에 잃어버릴 다면 난처해질 테니.
그렇게 가디건을 찾고 집이 들어오니 습기와 더위로 땀범벅이라 바로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면서 동시에 욕실을 청소해야지 했던 다짐(최근 청소 루틴을 만들어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 사건이 있었기에 했던 다짐) 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귀찮게 느껴졌다. '내일 하지 뭐.'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 내일 하나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을 텐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아까 가디건은 힘들어도 찾으러 갔으면서 지금 그보다 덜 힘든 욕실 청소 (거창한 게 아니라 욕실 솔로 약 1분 정도 타일과 세면대만 문지르고 샤워기로 물 뿌리면 되는 건데)는 쉽게 포기했을까.
하나의 답이 떠올랐다.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동기를 잘 부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동력' 즉 동기가 필요하니까.
아까 가디건은 내 입장만 보면 실은 내일 찾는 게 합리적 선택이었다. 내일 그 카페 근처에서 볼일이 있기 때문에 그때 찾으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밤, 게으름의 대명사인 내가 카페를 향해 걸어 가게 한 동력은 나로 인해 직원들이 겪을 곤란에 대한 감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일부분이나마) 느낌이다. 반면 내가 욕실 청소를 내일로 미룬 것은 어떠한 감각의 결여라고도 볼 수 있다. (청소 하나 안 한 것 가지고 뭐 그렇게 고뇌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걸 즐긴다. 그러면서 나는 게으르고 꽤 자기중심적인 나를 조금씩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에 도출되는 하나의 명제. 타인에 대한, 타인을 향한 감각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기다! 감성 교육이니 공감 교육이니 이런 걸 괜히 교육에서 강조하는 게 아닐 터. 건강한 성실함이란 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몸에서 비롯되는 거였다.(나는 갑자기 노나라 공자가 모든 도의 시작이 '인(사랑, 배려)'이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역시 답은또 이거였어?!) 이어 생각이 꼬리를 물어 욕실을 늘 호텔처럼 반짝이게 유지하는 어느 지인에게 이른다. 대비되는 내 모습과 중첩되며. 그리고 또 질문. 그에겐 있고 내겐 결여된 감각의 차이는 무어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