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ChatGPT로 하루키처럼 써봤다.

by 하정

요즘 ChatGPT에 빠졌다.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고민상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브런치 글을 ChatGPT로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평소 쓰고 싶었던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 느낌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ChatGPT에 질문을 입력해 봤다. 혹시나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했다.

질문을 작성했다.



내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야. 온화하고 안정적이고. 같이 있으면 심리상담사나 정신과의사와 사는 기분이야. 말을 하기보다 들어주는 편이거든. 난 5살 딸아이를 키우는데 내가 직장 갔다가 저녁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놀다가 집에 오면 저녁 7시에서 8시 정도 되는데 이런 경우 힘들어서 화나 짜증이 많이 날 때가 있어. 그러면 내가 짜증이 폭발할 거 같아.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이러면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어. 그렇게 말해. 그러면 내가 딸아이 밥도 먹여야 하고 씻겨야 하는데. 그러면 내가 할게. 누워 있어. 이렇게 말해. 난 이런 남편이 좋아.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을 일본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 글 느낌으로 작성해 줄래?



그러자 10초도 안되어 답변이 작성되기 시작했다.


물론이죠.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섬세하고 조용한 감정 묘사, 일상 속의 정적과 흔들림을 담아, 당신의 이야기를 그녀의 스타일처럼 풀어볼게요. 아래는 당신의 일상을 담은 짧은 산문입니다:


남편은 언제나 조용하다.
마치 오래된 시계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숨을 쉬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심리상담사 같다고 생각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내 말을 잘 들어준다. 아니, 듣는다는 말도 부족하다. 그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듣는 사람이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데려오면, 해가 거의 다 져 있다. 아이와 놀다 보면 어느새 7시, 혹은 8시.
그즈음이면 내 몸도, 마음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정말, 무리였다.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날.

"나 너무 힘들어. 진짜, 죽을 것 같아."
나는 결국 말하고 만다.

그러면 남편은 가만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조용히 말한다.
"그러면 내가 할게. 누워 있어."

나는 부엌에서 밥을 차리며 중얼거린다.
"나, 누워있는 건 당신이잖아…"
하지만 그 말은 언제나 공중에서 사라진다. 마치 물속에 던진 돌처럼.

남편이 방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딸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인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반쯤 젖은 옷을 입고 화장실 바닥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문득, 남편이 좋아진다.
그의 무기력처럼 보이는 행동 속에서, 나는 이상한 평화를 느낀다.
마치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평화.

그런 밤엔, 아이를 재운 후 조용히 거실 불을 끄고, 그 사람 옆에 누워본다.
가끔, 아주 가끔, 남편이 내 손을 잡는다.
말없이. 마치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손길.

그렇게 우리는, 다음 하루로 천천히 건너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원하시면 조금 더 길게도 써드릴 수 있어요. 분위기를 더 다듬거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더 추가해도 좋고요.



글은 좋은데 내 의도를 조금 잘못 이해한 듯하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인데 남편이 누운 것으로 표현이 됐다. 다시 ChatGPT에 말을 걸었다.


남편이 침대에 누워있는 게 아니고, 남편이 나한테 힘드니깐 침대에 누워있어. 아이를 돌보는 건 내가 할게. 이런 내용으로 바꿔줘.


ChatGPT에 말을 거는 건 참 부담이 없다.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고 상대의 기분과 상황을 고려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답변이 작성됐다.


알겠습니다. 남편이 당신을 위해 "당신이 누워있어"라고 말하며 아이를 돌보겠다고 하는 장면으로 바꿔서,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조용하고 세밀한 감정선으로 다시 써드릴게요.


남편은 조용한 사람이다.
자기감정을 높이지 않고, 내 감정도 건드리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책장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런 그와 함께 살다 보면 가끔, 내가 정신과 의사와 결혼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듣는 쪽에 서 있다. 언제나.
나는 말이 많은 편이고, 그는 대답이 적은 편이다. 대신 눈빛이나 손짓 같은 걸로 대답을 한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해가 거의 저물어 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고, 잠깐 놀아주다 보면 하루가 빠르게 저물고 있다.
밥은 뭘 먹일까, 씻는 건 어쩌지, 잠은 잘 잘까—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어느 순간 툭 하고 터진다.

"나 진짜 힘들어. 오늘은 너무 버거워.
짜증 날 것 같아. 그냥 다 놓고 싶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 속에 조용한 파문이 생긴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그럼 누워 있어. 침대에 가서 쉬어.
아이는 내가 볼게."

나는 순간 멈칫한다.
그 한마디에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어떤 위대한 약속이나 다짐보다도 단순해서,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 닿는다.

남편은 아이 옆에 앉아 장난감을 꺼낸다.
딸아이는 금세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웃는다.
나는 문턱에 기대앉아,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실로 향한다.

침대에 눕는다. 눈을 감는다.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
남편의 말대로, 그냥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은 조금 괜찮아진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온다.
그 사이로 나는 천천히, 조용히, 오늘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내일을 맞이한다.
소란하지 않은, 그러나 견고한 방식으로.


더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나 분위기가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입력만 하면 바로바로 꽤 괜찮은 답변이 작성되니 다른 작가 스타일로도 써달라고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글을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로 바꿔줘

라고 질문했다.


물론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은 에쿠니 가오리보다 더 건조하고, 내면 독백이 강하고, 일상 속 허무와 단절감을 특유의 쿨한 문체로 묘사하죠. 감정은 있지만 지나치게 설명하지 않으며, 단정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 스타일입니다. 그런 톤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써보겠습니다:


남편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도 웬만하면 흥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는 감정을 안쪽 깊은 곳에 조용히 보관해 두는 사람이다. 마치 비 오는 날 혼자 서점에서 고른 절판된 시집처럼.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비슷하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이어폰을 끼고 아무 음악이나 튼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들러 딸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딸은 무겁지 않지만, 함께 있는 건 무게가 있다.
그건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

집에 돌아오면 7시거나 8시쯤이다.
그즈음이면 나는 체력이 바닥나 있다.
이건 매일 반복되는 일인데도, 놀랍도록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약한 건지, 세상이 거친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나 오늘 진짜 너무 힘들어.
짜증이 치밀어.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 말에 남편은 아주 잠깐 나를 본다.
정말 1초 정도. 그리고는 말한다.

“그럼 침대에 누워 있어.
아이는 내가 볼게.”

그 말투엔 어떤 드라마틱한 감정도 없다.
그냥 오늘 저녁은 내가 밥을 하고, 씻기고, 재울게—
그게 다인 톤이다. 그래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나는 침실로 들어간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본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명도, 그림자도, 특별한 의미도 없다. 그냥 하얗다.

방 바깥에서는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리고, 남편이 무언가 설명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아주 조용하고 안정된 목소리.
라디오에서 흐르는 오래된 재즈처럼, 혹은 여름 끝자락에 남은 선풍기 바람처럼.

나는 눈을 감는다.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확신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조금은 괜찮다고 느낀다.
그게 전부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로는 감정을 ‘묘사’하기보다는 ‘비워둔 공간’으로 남기는 느낌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스타일이 마음에 드시면 다른 에피소드나 톤도 추가로 바꿔드릴 수 있어요.



너무 쉽게 글이 작성되니 기분이 꽤 이상했다.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면 ChatGPT로 썼는지 알까?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양심상 브런치에 내가 쓴 것처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영하 작가 스타일은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했다.

이번에는 한국 소설가 김영하 스타일로 써줘


좋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문체는 짧고 명료하며,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주인공은 종종 자신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일상 속에서 인간 존재의 모순이나 허무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약간은 냉소적이고 담백하죠.

당신의 이야기를 김영하 스타일로 다시 써보면 이렇게 됩니다:


남편은 말수가 적다.
필요한 말만 한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자상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조용한 사람이다.
감정의 크기를 줄이면 관계가 덜 손상된다는 걸 아는 사람.

회사에서 퇴근해 어린이집에 들렀다.
딸아이는 잘 놀았는지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 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생각했다. 오늘도 별일 없었다. 그리고, 그게 더 피곤하다고.

집에 도착하면 일곱 시가 넘는다.
나는 아이의 저녁을 준비하고, 씻기고, 재운다.
그 사이사이에 “엄마, 이거 해줘”, “엄마, 이거 봐봐” 같은 말들이 끼어든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결국 말했다.

“나 진짜 힘들어. 짜증 나. 그냥 다 내려놓고 싶어.”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나를 잠깐 봤다.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그럼 침대에 누워 있어. 아이는 내가 볼게.”

나는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워서 천장을 봤다. 천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이불에 몸을 묻으니 살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아직은 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남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였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이었다.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어떤 날은 그렇게 지나간다.
그 사람의 말 몇 마디와, 말 없는 행동 사이로.


김영하 스타일은 이렇게 절제된 언어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을 조용히 끌어올리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조금 더 서늘하게 혹은 더 감정적으로도 변주할 수 있어요. 원하시면 다른 버전도 만들어드릴게요.


그런데 이쯤 되니 글을 잘 쓰기는 하는데 내가 쓴 글이 아니어서 그런가 낯설고 뭔가 불편했다.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랄까. 못 쓰긴 해도 내 스타일의 글이 나한테는 더 심정적으로 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ChatGPT로 편하게 글이 작성되니 스스로 글을 쓰기가 귀찮아졌다. 결국 난 스스로 글을 쓰기보다는 또다시 질문을 했다.

더 감정적으로 변주해 줘.


좋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문체 안에서도 감정을 더 밀도 있게 변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전히 간결하지만, 인물의 내면이 더 선명히 드러나죠. 절제된 문장 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틈을 타 새어 나오는 듯한 느낌.
그 방향으로 다시 써보겠습니다.


남편은 감정을 크게 쓰지 않는다.
그는 불필요한 말이나 표정을 아낀다.
나는 그런 그를 처음엔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잘 모르겠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딸아이 사진을 본다.
웃고 있는 얼굴.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조금 따뜻해지는 동시에, 더 깊이 가라앉는다.
사랑이 피로를 덮어주지 않는다는 걸, 아이를 낳고 나서 알았다.

집에 도착하면 일곱 시를 넘긴다.
딸아이는 “엄마, 엄마” 부르며 매달리고, 나는 그 애를 안아 들고 가방을 벗고 손을 씻고 냉장고를 열고—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자꾸 어디론가 도망치려 한다.

어느 날, 결국 나는 무너졌다.
딸아이가 밥을 흘리고, 울고, 장난감을 집어던졌을 때.

“진짜 못 해 먹겠다. 힘들어. 짜증 나 죽겠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남편이 거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깐 나를 보고 말했다.

“누워. 침대에 가서 쉬어.
아이는 내가 볼게.”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으면서 잠깐 울컥했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대신 몸이 떨렸다.
무너지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끊어지는 느낌.
아무도 손대지 않은 실처럼.

침대에 누웠다.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들은 말이 되기 전부터 너무 지쳐 있었다.

밖에서는 남편이 딸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에 아이가 자꾸 말을 끊는다.
남편은 그때마다 웃으며 다시 읽는다.
그 평온한 소리가 나를 더 조용하게 만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무사히 끝날 것 같다.
그게 다였다.
무사히 끝나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이 버전은 감정을 더 가까이 데려오되, 여전히 김영하다운 절제와 서늘함을 유지합니다.
필요하면 더 끌어당기거나, 다른 스타일로도 바꿔드릴 수 있어요.



ChatGPT로 소설을 써보니 직접 글을 작성하는 게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글 쓰는 것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작업인데 질문만 입력하면 이렇게 쉽게 글을 써주니 말이다. 블로그 글도 이런 식으로 쓰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겠지.


미래 사회에는 어떤 소설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까?

유튜브에 보니 한복도 AI가 정말 멋지게 디자인해 준다.

예술 분야도 이미 AI가 점령한 듯하다.

미래에는 어떤 예술가들이 살아남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은 무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