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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May 14. 2023

없음이 가고 있다

배수아,『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단편집『올빼미의 없음』의 표제작「올빼미의 없음」을 먼저 읽고 보시길 권합니다.


"이 없음이란 무엇인가, 없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고 없음이란 도대체 왜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정말 '무無'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가.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은 일견 문장의 구성 요소를 만족함으로써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오직 역설의 형태로만–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물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내재된 역설은 어떠한 대답도 구해주지 않는다. 없음은 오는 것도, 심지어 있는 것도 아니다. 혹시 언어는 의미상 불가능한 질문을 형식상 가능한 형태로 엮어낼 수 있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답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닐까?

죽음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늘 죽음은 일종의 추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겪은 후에 대해 말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이 그것의 대상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것의 목격자로서만 그것을 증언할 뿐이다. 그러므로 없음은, 일종의 간접적인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목격이다. 누군가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상태. '누군가의 없음'. 죽음은 오직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올빼미의 없음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촉발되어 돌이킬 수 없어진 상태이다. 나무는 잘려나갔으므로 올빼미는 결코 그 나무 위에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빼미의 없음은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고 상상되는 상태–다시 볼 수 없음–에 불과하다. 배수아는 그렇게 외르그의 죽음을 이해한다. 그것은 나무가 잘려나갔으므로 더 이상 올빼미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난데없는 사건이라고. 이제 남은 것은 앙상하고 황량한 외관의 처참한 풍경 뿐이다. 커다란 전나무에 앉던 올빼미는 더이상 오지 않는다. 만일 올빼미가 배수아의 서재 창문을 통해 날아들더라도 그건 그 올빼미가 아니며, 그러므로 아무것도 위로할 수 없다. 표면적 유사성이나 혹은 일반적인 유추는 죽음이라는 진공을 도저히 채울 수 없다. 혹은 만일 그 전나무에 앉았던 바로 그 올빼미가 돌아오더라도. 이미 모든 것은 흘렀고, 죽음은 세계를 두 갈래로 도륙냈다. 


그녀는 기억 속에서 외르그를 떠올린다. 그는 한때 배수아를 기차역에 바래다주며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네가 기차 안에 자리를 잡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만 우리들이 작별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가, 작별이란.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만'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라짐과 없어짐과 같은 것들은 스스로 체험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것을 내 눈으로 봄으로써 그것을 잊은듯이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지 않은 사람에겐 "사악한 거짓말"이며, "최악의 농담"이자 "최대의 독설"인 "헛소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을 이해시킬 진정한 수단이나 방법이 있는가? 죽음을 목도하지 못한 한 사람이 죽음을 설명하기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 사람을 납득시킬 방법이 있는가?


배수아는 한때 봄의 충만을 느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일종의 충동이다. 무엇을 위한? 살인 혹은 폭력에 대한? 다시는 "이 미칠 듯이 처절한 죽음의 봄을 노래할 일은 없으리라. 한 생명이 가고, 그리하여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무덤을 딛고서 모든 젊은 아름다움과 신선하고 달콤한 환희가 활개치며 찾아온다면, 나는 향기로운 봄의 입술에 절대 찬미를 보내지 않겠다. 그 입술이 무엇을 빨아먹고 살이 올랐는지 먼저 생각하게 되리라."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탄생에 빚진다면, 평생동안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자연은 조화롭고, 인간은 운다." 베르그의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단지 죽음이라는 불가사의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들의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배수아가 원하는 것은, 유기체적 운명의 일반화된 미화가 아니다. 배수아가 온몸을 바쳐 원하는 것은,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개체의 현존이다. 그러나 베어진 전나무 위로 새로운 전나무가 자라고 올빼미가 앉는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올빼미의 없음을 위로하지 못한다. 단지 그 올빼미가 사라지고 난 다음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각주도 서평도 없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어진 이 책"이다.



시간을 강물로 해석하는 것은 낡은 관습이다. 그것은 헤졌고, 그래서 때론 고지식한 오해나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고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강물을 응시하듯 시간을 이해하고, 일순간 "지금 이렇게 강가에 앉아 물속을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이며, 앞으로 영원히, 두번 다시는 지금 이 순간 이 강물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바로 그 사람일 수는 없을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어느 순간 강물 속으로 발을 내딛고 고귀한 "지금-현재"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게 될 테지만 그것은... 오직 죽음만이 지금-현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살아있는 자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없으므로.



그러나, 올빼미의 없음에 대한 구원은 영영 불가능한가. 죽음의 굴레에 갖힌 우리의 정신적 행위는 "생을 향한 허망한 교태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없는가.


진정한 죽음을 목격한 적이 없는 그녀에게 사는 동안 허락된 일은 세 가지였다.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 이 세상에 남겨진 동안 할 수 있는 일들. 무언가를 '안다'는 신념은 두렵다. 그러나 불현듯한 충동에 휩싸여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요, 분명히 당신 어머니와 어린 당신이 올 거예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여기서 그들을 지켜볼 수가 있단 말이에요. 내 말을 믿어요. 당신은 리얼리즘의 학자지만, 나는 그런 비슷한 이야기의 소설을 늘 생각하고 있었던 작가니까. 이번에는 내가 맞아요."

꿈을 일종의 문학이자 삶으로 생각하던 그녀와 일종의 누설이자 분석의 대상으로 여기던 그. 그는 일순간의 환상에 붙잡혔고, 그녀는 그 리얼리스트가 현실에서 꿈을 마주하는 순간을 포착했으며, 거기서 순전히 즉흥적으로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그 순간 균열을 일으키는 건 둘 사이의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리얼리즘 안에서 굳게 닫혀있던 세계이다. 거기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낙하한다. 

외르그는 황급히 도망간다. 보면 안되는 것을 보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생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갔다. 너는 우리의 반대편에 놓인 숲과 강물로부터, 불현듯 나타난 어떤 동굴의 시간으로부터 주저없이 얼굴과 눈길을 돌렸다."


배수아는 프란츠 카프카의 「꿈」 65페이지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는다.(쓴다.) 그것은 "카프카의 꿈이기도 하고, 나의 꿈이기도 하다."

"지워지지 않는 꿈. 한 사람이 가고 있다. 모든 사물이 물속처럼 정지한 채 온몸으로 느리게 흐느끼는 강변. 한 사람이 가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대기는 드리워진 베일처럼 희미하며 숲 언저리는 초록빛이다. 나는 강가에 앉아 물속을 들여다본다. 한 사람이 가고 있다. 그 사람은 마을을 지나쳐서 간다. 집들은 입을 다물고 고요한데, 문앞에는 아이들이 서 있다. 아이들은 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말없이 쳐다본다. 그리고 지나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녀는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접속한다. 그의 현존을 실감할 수 있는 곳으로, 하데스로, 강물속으로. 누군가 지나가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방식이다. 기차 안에 탄 배수아를 눈으로만 보아야 작별이라고 말하는 외르그의 방식이다. 대신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험한다. 그의 현존을. 그녀는 죽음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신념을 두려워한다. 대신에 걷고, 울고, 쓴다. 그곳에서 카프카의 꿈 위로 배수아의 꿈은 포개어지며, "한 사람이 가고 있다. 나는 그 안을 응시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리하여 없음이란 일종의 보이지 않음에 불과하다. 없음이 무엇인지, 없음이 어디서 오고, 없음이 왜 있는지는 리얼리즘이 요구하는 세계 속에서는 역설이었으나, 균열의 틈으로 새어들어온 꿈의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거기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없음을 지시하지 않는다.

베르너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없어짐은, 완전한 없어짐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형태로 환원되어 우리에게 막연하게 와닿는 자연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배수아는 그것을 맹렬히 거부한다. 그녀가 원하는 건 물질이 아니므로. 방부처리를 하지 않은 외르그의 육체가 땅의 일부가 되고, 다른 생명체의 성분이 되고, 그리하여 바람과 햇빛, 떨어지는 꽃잎과 낙엽에 섞여들어가는 것은 외르그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몰이해를 미화할 필요가 있는 모든 필멸자들의 자기위안이다.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외르그의 현존에 대한 감각이므로 균열의 틈을 따라 걷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음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하는 대신 울고, 쓴다. 그리하여 꿈꾸고, 비로소 느낀다. 거기선 "빛보다 밝은 색채가 되어 그대로 사라"진 한 사람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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