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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Jun 07. 2023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후기

이방인을 경유하여, 불발 지뢰를 피하듯 걷기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고 뒤라스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미 지면에 잉크로 새겨진 말을 읽었으므로, 일말의 저항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그런가, 당신은. 이 문장을 읽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므로, 그것은 한없이 가볍거나 한없이 무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금 묻는다. 그런가, 당신은.



흔히 파동에 대해 우리가 갖는 아주 큰 오해는, 파동이 아니라 파동을 옮기는 매질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착각을 준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공을 구하기 위해 고요한 수면 위에 끝없이 파문을 일으키듯. 그러나 공은 꿈쩍도 않은 채 자신의 위치를 고수한다. 그리고 이 소설 또한 그러하다.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된 글은, 숫자 4로 구분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에 대한 네 번의 변주에 가깝다. 사라는 무더위 속에서 깨고, 늘 무더위가 한 풀 꺾이기를 기대하며 잠에 든다. 나는 어느 순간 이 모든 글이 꿈이라고도 현실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소설은 자신의 꿈/현실 속으로 나를 초대한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꿈, 혹은 매번 반복되는 꿈은 점차로 악몽에 다가서는 건 아닌지. "사랑 뿐만 아니라 욕망 또한 그토록 변치 않고 오래간다면, 그 역시 절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누가 알겠는가?" 매번 똑같은 시작과 똑같은 결말을 가진 네 번의 변주는 형식 자체로는 벗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듯하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인 휴가는 무더위만으로도 모든 것을 짜증나게 만든다. 특별한 휴가는 그렇게나 쉽게 악몽으로 변질된다. 그래, 모든 건 태양 탓이다. 이곳은 휴가를 즐기기에 너무나도 덥다. 하지만 더위는 모든 것을 악몽으로 만드는 힘이 아니다. 정작 모든 것을 악몽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그들의 삶이다. 하루에 한 번씩 뜨고 지는 해가 그들에게 악몽이 될 수 있다면, 모든 삶은 악몽이던가. 혹시 네 번의 변주를 악몽으로 만드는 것은 한 치도 변하지 않으려는 그들이 아닌지.

한 여행자를 두고 벌어진 태양과 폭풍의 내기는 너무도 유명하며, 그 내기에서 이기는 것은 태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자명하다. 그러나 왜. 폭풍과 달리 태양은, 옷을 벗기는 게 아니라 벗게끔 하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무더위는 모든 것을 벗기고 밝힌다. 한낮의 태양은 그림자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태양이 가장 높은 순간엔, 그림자마저도 자신의 모호함을 빼앗기므로. 명과 암은 직진하는 광선 앞에서 칼날처럼 베어지므로. 그러므로 어느 이탈리아의 해변에서, 가로수 하나 변변찮은 휴양지를 가득 채운 무더위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건 상대방을 향한 가식과 거짓이다. 그들은 일종의 사소한 일탈로 상징되는 휴가 기간에마저도 가식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태양은 언제나처럼 온화하고 헌신적일 뿐이다. 무더울 정도로 가식을 껴입은 건, 그들이다.

그래, 태양. 태양이 전부다. 이 소설은 한편으론 태양에게 쏟아지는 찬사이며, 그것에게 바치는 사소하고 갸륵한 사랑 이야기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여름에 더 잘 드러"나고, "태양 아래서, 각자의 성질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부모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그러하듯,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가 비로소 태양이 뜬다,라고 저도 모르게 되뇌인다면 그것은 단 한치의 비유도 포함되지 않은 진술이다. 태양은 뜨고, 우리는 비로소 사랑한다.



이방인을 경유하기


나는 그렇게 읊조리며 그들이 있는 만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완만한 곡선을 따라 푼타 비앙카를 지나고, 거대한 암석 절벽을 넘어 멀리까지. 해변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이 하나의 띠처럼 보일 정도로 멀리멀리. 그러면 어느 순간 총 여섯 발의 총성이 들릴 것이다. 거기는 군데군데 커다란 암석들이 박힌 모래사장이다. 거대한 암석은 태양이 허락하는 만큼만의 그림자를 모래사장 위로 드리우고, 거기엔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 한 구, 그의 손에서 떨어진 듯한 단도, 그리고 현기증에 신음하는 뫼르소를 발견한다.

카뮈는 이방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은 사실주의도 아니고 환상적인 장르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육화된 신화, 그것도 삶의 살과 열기 속에 깊이 뿌리내려진 신화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새로운 유형의 배덕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 그는 햇빛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다나 바람처럼 존재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뒤라스의 글에서, 우리는 뫼르소를 둘러싼 재판에 상응하는 것들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가 재판을 행하듯 행동한다. 이방인의 재판 속에서 '뫼르소'는 필요치 않고 다만 핑계에 불과하듯, 그들 또한 관계의 핑계로 전락한다. 대화는 점점 맹목적이어지고, 관계는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인다. 양쪽 끝이 고정된 실은, 점차로 진폭을 잃어가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완전한 평형 상태에 이르러 더이상 떨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배를 타고 나타난 장(Jean)은 그 실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거칠게 튕긴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리하여 어떤 가식도 없이. 목적이 없다는 것은 행위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충실하다는 것이므로. 종국에는 그의 손가락은 단 한 번의 줄 튕김을 위해 탄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장은 말한다. "원하시면요. 당신이 정말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사라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낯선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구의 것도 닮지 않은 목소리로 말해지는 가장 단순한 진리였던 것일까. 모든 것을 드러내는 태양 가득한 오후, 사라는 너무나도 간편한 장의 한 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숨이 턱, 하고 막히듯. 장은 더위와 내리쬐는 햇빛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듯 말한다. "여기 태양 아래서, 당장, 사랑 할 수도 있어."


그렇다. 장의 말처럼, 오히려 사랑은 쉽게 말해질 수 있다. 쉽게 말해질 때에야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진다. 사랑의 본질은 진정성이라거나, 헌신과 충정 같은 성질들이 아니다. 사랑은 상태로만 표현되는데,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쉽고 간편하게 말해질 때 오히려 사랑은 사랑에 가까워질 가능성을 얻는다. 사랑은 단 한 번도 무거움을 필요로 한 적이 없다. 어차피 사랑은 완벽히 말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장이 자신의 사랑을 가장 잘 행하는 방법이 쉽게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므로, 비록 사랑이 쉽게 말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에 가장 근접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 교차하는 무수한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서야 사랑을 아주 희미하게, 그리고 아주 낡은 것으로, 거의 어린 시절의 섬광처럼 남은 기억에 대한 노스탤지어만큼이나 불확실한 채로 느낄 뿐이다.

이를테면 노파는 돌연 지나에게 묻는다. "마침 묻고 싶었던 건데, 그 봉골레 말이우, 팬에 봉골레를 토마토보다 먼저 넣수? 아니면 나중에?"

이를테면 노파의 남편은 식료품상에게 느닷없이 말한다. "그래서 가게를 늘린 다음엔?"


한없이 현실적인 느닷없는 질문들은, 그 전까지 이 소설을 굴려오던 감정선을 결코 놓치지 않은 채 다시금 그들을, 그리고 나를 삶의 선상으로 복귀시킨다. 그래, 사랑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은 단 한 번도 증명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다. 그것은 단지 삶의 일부로서, 단 한 번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대화에 오해는 있어도 감정엔 오해가 없고, 바로잡을 것도 없다. 다만, 다시 매 순간 새로이 원점으로 복귀하는 삶 위에 새로운 진폭으로 쓰여지는 새로운 감정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단 한 번도 말해진 적 없으며, 말해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은 매우 가벼운 단어에서 한없이 무거운 의미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한다. 우리는 단지 상태로만 그것을 말한다. 말해질 수 없음.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그녀의 선언은 다만 말해질 수 없는 사랑의 상태에 대한 변주인 것은 아닌지.




덧. <위기에 대해_불발지뢰피하기게임>


이건 위기를 겪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며칠 전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위기를 맞았다. 그너는 눈물을 보였고, 한동안 먼 산을 바라봤으며, 자꾸만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자신은 감성적인 면으로 가득하며, 그것이 싫다고, 나는 나랑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이성으로 모든 걸 재단하듯 딱딱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프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내가 이성적인지 감성적인지 전혀 알 수 없고 때로는 그렇고 때로는 아닌 만큼 때로는 그렇고 때로는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성적인 사람을 대변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말했다. 아마 다른 종류의 고민을 안게 되지 않을까요... 늘 타인에게 겸손하고 가식이 없는 쪽에 가까운 그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나는 내가 가진 말들 중에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내 조언의 목록이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힐 만큼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어떤 선택 이후에 올 미래들 중에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었으므로.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를 사고할 수 없다고, 또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으므로. (만일 가능하다면 인류가 한 순간에 멸종하는 것이 가장 나은 미래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일어날 법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해주는 조언이 일어날 만한지 아닌지를 도통 알 수가 없고, 그것이 미래의 행동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알 수 없고, 결과적으로 좋은 조언을 구분해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할 순 있지만 조언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된 의견이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마치 지뢰 피하기 게임에서 모든 지뢰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해나가기도 한다.

조언의 시나리오를 지뢰 피하기 게임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칸 한 칸 밟아나가는데 기적처럼 모든 지뢰들을 피한다.

2. 밟아나가는 도중에 지뢰를 만난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몇 발자국 전으로 되돌아가기(Ctrl+z)를 몇 회 반복한다.

3. 이미 모든 지뢰를 알고 있으므로 노력하는 티도 안내고 지나간다.

4. 시드가 바뀌는 경우, 1~3을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위기든, 미래든, 무언가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는 대상을 불변하는 사물이나 상태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뢰피하기 게임을 하는 동안은 지뢰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므로 되돌아가기(Ctrl + z) 커맨드는 언제나 효과적이고, 이 지뢰의 지도만 기억하고 있다면 내일도 동일한 게임을 할 것이므로 완벽히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그에 반해 나은 미래와 그렇지 않은 미래, 그럴싸한 미래와 그렇지 않은 미래를 구분할 수 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아닌) 이야기는 단 하나이다. 기적적으로 모든 지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지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모든 가능 미래들과 정확히 동등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오히려 이 편이 잠재력이 크지 않은가.)

말하자면, 불발지뢰로 가득한 지뢰피하기 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게임의 룰은 하나다.  


    기적처럼 모든 지뢰는 터지지 않는다.

그러나 첫 움직임을 선택하자 마자 팝업창이 하나 떠오른다.

Q. 당신은 지나온 지면이 실제로 지뢰가 없는 곳이었는지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예/아니오 (아니오를 선택하시면 이전의 움직임은 취소되고, 게임을 더 이상 진행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니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문득 드는 의문. 내가 기적처럼 모든 지뢰가 터지지 않는 경우의 수를 상상해내는 건 내가 기적적인 경우와 가장 일어날 법한 경우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서인지도. 나의 세계에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이길 확률이 월등히 높고, 가위바위보의 결과가 자신감의 정도를 말해주므로. 웃긴 소리라고 하겠지만, 진짜 웃긴 소리를 하는 중이므로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에 관심이 더 많고, 지겨울 만큼 다시 말하자면 일어날 법한 것과 일어나지 않을 법한 것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건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죽음이 그토록 무섭고 싫은 이유는 아직 인생에 일말의 재미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의 차이를 물어선 안된다. 거기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거나 교훈을 늘어놓거나 조언을 늘어놓아서도 안된다. 나는 어차피 듣지 않을 것이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점점 멀리하게 될 것이다. 내게 필요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 내가 한 말에 대해 말하는 사람, 그리고 아주 드문 확률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면 많은 경우 바보 취급을 받거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몽상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옆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충 이렇게 지시대명사로만 얼버무려도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관습적이고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단어가 단어를 자연스레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자신이 아니라 말이 말하도록 놔두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문장은 루머처럼 이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원천은 없는 그런 종류의 말들. 일종의 오염. '언어가 오염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언어가 빛을 잃을 때이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좋다고 말하는 나는, 홍대병이라거나 미친놈이 아니라 다만 언어가 틈을 벌려 자신의 빛을 드러낼 때를 포착할 줄 알고, 그 빛에 자연히 이끌리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배수아의 문장을 좋아하듯. (그러나 나는 고도로 치밀하게 이해를 조각내려는 의도에서 쓴 듯한 뉘앙스를 지닌 문장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래의 인터뷰에서, 내가 배수아의 문장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기가 막히게 표현할 수 있는 설명을 찾았는데, 나는 그녀에게 내 취향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겪는 삶의 경험마저도 어느 정도 의탁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배수아의 문장을 접한 이후로, 배수아의 문장으로 옷을 해입고, 밥을 씹으며, 베고 자고,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니 그녀는 나의 내면에서 글을 쓰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용기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것은 보통의 관점에서 보면 어딘가 뒤틀려 보이는데, 그건 우리가 틀어진 초점을 가진 렌즈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동공을 조각내라. 모든 것을 이상하게 만들어라. 멀끔하고 매끈해서 그럴싸하고 그럴 법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을 없애라. 운반가방으로 픽션을 쓰고, 사이보그가 되어 끔찍한 혼종임을 자처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계곡을 유영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가 돼라. 존재의 유한함을 무시해라. 기꺼이 타인과 손을 잡고 유한성을 초월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하는 이 게임은 불발 지뢰로 가득 채워진 지뢰피하기 게임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눈을 감는 대신 타인의 손을 잡고, 믿음 하나로 나아가면 이겨낼 수 있는 게임이므로.


끝으로 이 게임의 유일한 주의사항을 소개하도록 하자.

※주의사항※

불발인 불발 지뢰는 불발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을 더욱 세게 감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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