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기 위해 걷는다. 그녀가 쓰듯이.
나는 이 책에 대해 정제된 형식의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단지 생각나는 것을 아무런 종이에나, 심지어 카페의 티슈에다 대충 휘갈겨 쓰듯이 내 삶을 경유해 드러나는 이 책의 순간에 대해서 밖엔 쓸 수 있는 말이 없었으므로...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인간이 느끼는 것을 정확히 인간이 느끼는 느낌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이 명확하다면 투명하고 명확하게, 그것이 불명확하다면 불명확하게, 그것이 혼돈에 싸여 있다면 혼돈스럽게. 그리고 문법을 법칙이 아닌 도구로 이해한다.
한번 상상을 해본다. 내 앞에 남성적인 얼굴을 가진 한 소녀가 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소녀는 사내애처럼 생겼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다른 인간, 하지만 말이 곧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인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소녀는 사내아이다." 역시 표현의 의무를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의미심장함과 속박되지 않은 상상력에 좀 더 강력하게 이끌리는 유형이라면, 소녀를 "이 소년dieser Junge"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면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소년dieses Junge"이라고 말하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우리나라에 배수아의 번역으로 소개되었으며, 배수아 또한 내가 아는 한 가장 속박되지 않은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아직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다'는 말을 믿는다면, 그건 오직 한 사람, 그녀를 위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밝혔듯, 그녀는 결코 이해받기 위해 쓰지 않으므로, 느낀 것을 표현하는 것에 거침없다. 이미 말해진 것은 한없이 낡아버린 것이고–클라리시가 말하듯 당신이 본 달걀은 3천 년 전의 달걀이다–그것은 더이상 그 때의 뜻을 담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책을 빌려 말한 것처럼 모든 것들은 단 한 번의 도약이 필요하듯 (그러나, 모든 것은 단 한 번의 도약이 필요한가?) 그것은 언어에서 의미로 도약하지만 일순간 모든 북소리가 멈추고 춤을 멈춘다. 회색으로 물든 가운뎃손가락 끄트머리처럼, 그것은 춤을 추는 자만이 감각할 수 있는 가장 예민한 곳이지만, 회색의 죽음에 물들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니 그것은 혼자 추는 춤이다. 그 춤은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위한 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누구에게 보이는 순간 삼천년 전의 춤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다른 책에 쓰인 그녀의 문장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말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로 읊조리는 이 문장을 무제한 복제가 가능한 데이터의 형태를 빌려 들었지만, 오히려 그 사실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를 삶의 순간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듣고, 쓰면서 듣고, 자면서 듣는다. 마치 단 한 번의 새로운 듣기를 위해 모든 순간에 듣기를 그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아무 곳에서 아무 때에나 듣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아무 곳에서 아무 때나 읽기 위해 늘 가방의 한 켠에 넣고 다닌다. 손에 짚이는 순간 펼치고 읽는다. 예기치 못한 찰나의 바람은 내가 읽던 문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두껍고 팽팽한 지면은 내 손가락의 지문을 떠나 원하는 만큼 넘어간다. 구태여 읽던 곳을 찾지 않더라도 괜찮다. 배수아는 오히려 그러길 바랬을지도 모르니까. 춤은, "즉흥적인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냈을 뿐"인 순간 시작되므로. 그러니 춤은 어떤 손동작으로, 혹은 북소리로, 혹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이나 언어의 형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느낌표를 늘 달고 오는 깨달음의 순간에야 막 바로 전까지만 가능했던 춤의 공존을 회상할 뿐이다. 춤이 성스러운 이유는 스스로가 수단이기 때문이고, (개인적인 의미를 덧붙이자면) 나에게 춤과 자의식은 구분 불가능ㅎ할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시선을 염두에 두는 순간 춤은 '춤'이 된다. 그것은 오직 (춤)의 형태로 자의식과 함께 출렁일 때만 진솔할 수 있다. 그것은 즉흥적인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시작되고, 동시에 완결될 수 있는 찰나의 영원한 지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것을 깨달았던가? 찰나의 영원한 지속은 이해를 돕지도 않고,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네 시에 불현듯 기억을 모두 잃은, 동시에 기억을 시작한 그 순간으로 매번 회귀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고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춤을 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발걸음을 뻗는다면, 그 다음에 오는 모든 동작은 기쁨이나 절망, 심지어는 그 어떤 고통조차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기계적인 차원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신이 매번 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미없다. 그것은 언제나 '불현듯'이라는 단어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마술적인 힘을 갖는 순간은, 불현듯 페이지가 넘어간 순간, 불현듯 맞닥뜨린 휴식의 시간, 불현듯 욕구로 환원된 소설에 대한 갈망에 의해 임의적인 페이지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글 자체로 비순차적이며, 중첩되고 포개지듯 쓰인 글에서 서사를 쫓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독자로서 읽음보다 마주침에 더 가까워져야, 그리하여 우루처럼 보지 않은 채로 보는 순간이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미지와 단어들, 혹은 정확하게 똑같은 몇 어절의 표현들이 기시감을 만들어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만으로는 이 소설이 순환하고,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의 흔한 방식 중 하나이다. 모든 소설과 차이를 갖는 매혹은, 그러므로 독자가 소유하는 삶의 태도로부터 더욱 강력하게 기인한다. 산책하면서 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것이다. 길을 걸으며, 그러나 그 어떤 지도도 머릿속에 그리지 않으며. 오히려 무한히 확장하는 도시의 가장 내밀한 네트워크 속을 헤매기, (혹은 발저 식으로) 자아를 잃어버리기로서의 산책을 위해 이 책을 펼쳐든다. 이제 내 발걸음은 '불현듯' 나아간다. 내 발걸음은 '불현듯' 멈춘다. 뙤약볕이 정수리를 쪼아대지만, 살결 위로는 닭살이 도드라진다. 한기가 뼛속으로 찾아오고, 나는 책읽기와 걷기를 멈춘 채 한동안 햇살로 체내를 덥혀야 했다. 그 한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것은 마치, 빛이 그러하듯 어둠과 그림자가 나를 삼키는 감각 같기도, 혹은 가운뎃손가락 끝마디에 감도는 회색빛이 전류처럼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기도 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해를 향해 고개를 쳐든 나는 다시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을 뻗었다. 책장은 이미 아무렇게나 넘어가 있었고, 나는 내가 읽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읽는다. 그 순간 모든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것처럼, 혹은 그 순간 기억을 얻기 시작한 것처럼 책을 읽었다. 시간은 내 몸 위로 새로이 흐른다. 비순차적인 시간, 혹은 체현된 시간. 그리하여 시간의 비선형성은 획득된다. 이것은 순환도 아니고, 단지 매 순간 새로이 경험하는 시간에 대한 증언에 가깝다. 그러나 아주 어렴풋하게만 느껴지는 과거의 현존. 기시감. 그러나 나는 기억이 없으므로, 그것은 과거보다 현재에 더 가까운 존재로 다가온다. 아, 나는 춤을 췄더랬다. "오직 내면에서 우러난 즉흥적인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냈을 뿐인데!"
...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에서 본 바, 페터 한트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 In the woods, might be late이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을 빌려오지 않았나 싶어서, 꼭 보고 싶은 영화이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