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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Aug 21. 2023

Misty: 안개가 낀

엘라와 너와, 그리고 나

시간은 꼬인다. 아니, 시간은 꼬인 적 없다. 시간은 사건을 따라 겅충겅충 도약하듯 걷고, 나는 다만 그 시간의 걸음걸이에 무기력할 뿐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을 통해 나라는 존재는 접히고, 뒤틀리고. 단지 시간은, 한없이 곧게 뻗은 시간은 나를 여러 방향으로 관통할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뒤틀리고 접힌 시간을 경험할 뿐이며, 그 무기력한 시간의 관통 앞에서 내게 오직 필요한 것은,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나를 봐줘요. 나는 나무 위의 한 마리 고양이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엘라의 목소리는 그 어떤 것보다 말에 가깝게 들린다. 그녀가 언제적 인물인지, 지금은 살아있는지, 만연하는 봄에 재즈로 유명한 콘서트 홀에서 갈라를 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나는 결코 그것을 찾아보지 않는다. 단 한 소절에 의해 내 삶은 새로운 층위를 덧입는다. 여태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동일한 일상을 살고 있음에도 완벽히 새로운 의미의 한가운데에 서있음을 느끼는 것. 그것은 순수한 의미의 창조인가, 혹은 착각인가. 혹여나 내 주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깨닫지 못했을 뿐일까? 혹은, 이 노래 후반에 나오는 가사처럼, 단지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드는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일까?
엘라의 목소리는 공기의 떨림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내게 전달된다. 내가 결코 닿지 못할 그 축을 타고서. 그렇게 내게 전해지는 엘라의 목소리와, 그것이 담고 있는 시간에는 앞과 뒤, 선과 후, 과거와 미래가 없다. 그것은 다만 투명한 물 속에 떨어트린 잉크방울처럼… 시간은 내 의식 속으로 겉잡을 수 없이 확산한다. 나는, 꿈이 내게 보여주는 장면과 이미지들이 그러하듯, 시간이 나를 꿰뚫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것은 지나온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분하지 않고 내게 떠오르는데, 어떤 것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고, 어떤 것들은 이미 경험한 일임에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뿐이다. 어떤 감정은 마치 아주 빠르게 앞질러간 시간이 기울어가는 노을을 등진 채 나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짓는 듯하고,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된 일처럼 한없이 낡아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듯하다. 그러니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이미 일어난 일들을 구분해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엘라의 목소리가 타고 오는 시간은 오히려 사물에 가깝다. 그러나 나를 주체라는 제단에서 밀어 넘어뜨리고, 그리하여 그것과 내가 동일한 지면 위에 병치되는 순간까지 밀어붙이듯. 그리고 나는 이제 막 굴러떨어진 사람처럼 처참히…. 시간은, 그래, 이때까지 존재해왔고, 나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와 달리 시간은 너무도 단단하고, 때로는 고고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과 동일한 지면 위에 서있음에도 시간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다. 사물은 나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정통으로 바라본다. 단지 추상적인 시선만으로 물질 덩어리인 나를 꿰뚫으려는듯….
너는 말한다. 목격에 대해서 이야기해줘.
나는 너와 처음 대화를 나누던 날, 목격이라는 것에 대해 열성적으로 얘기했다. 짐짓 철학자인 척, 존재에 대한 심오한 사유의 결론인 척. 아마 나는 그 순간의 희열에 휩싸여 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들을 더 뱉어냈을 것이다. 다시는 기억나지 않을 이야기까지도 그 순간엔 내가 오랫동안 해온 생각인 것처럼 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길 꺼린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며. 지금의 침묵은 그 순간 내 것이 아닌 것을 뱉은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며. 무슨 말을 더 하고 덜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지금, 그 순간에 불현듯 찾아온 새로운 논리와 기막힌 비유는 정말로 내 것이 아닌지. 열에 들떠 저도 모르게 내뱉었던 말들은 정말로 내 것이 아닌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시간 앞에 무력하다. 그것과 내가 같은 지면 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건, 현재의 내가 과거의 한때 보였던 파편적인 자아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내가 목격에 대해 지금 이 순간 말하기를 꺼리는 것은 스스로가 만든 감옥이다. 대화보다 나은 침묵…,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정말로 그런지.
나는 너에게 말했다. 우리의 존재는 ‘목격'이란 우연적인 사건에 너무나도 의존적이라고. 아니, 사실 존재는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는 목격담으로만 이루어진 도시 괴담 같은 것이라고. 도시 괴담이 횡행하는 곳은, 어느 인적이 드문 외곽의 거대한 사거리라고. 교통량과 드문 인적에 비례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사거리는 결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지 못한 채, 그러나 그럴 것이란 기대에 의해서만 구축된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것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낼 만큼 비대한 형태를 갖는다. 사거리를 통제하는 듯한 신호등도 단지 점멸등으로 바뀌어 끝없이 동일한 신호를 반복적으로만 토해낸다. 깜빡, 깜빡, 깜빡, 이런 곳에서 괴담은 거의 자연적으로 생겨날 뿐이다.

누군가가 말한다, 나는 거기서 너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어. 무엇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몰라, 안개가 짙어 제대로 보진 못했거든, 게다가 나는 차를 타고 있었고, 여느 때처럼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중이었기에. 볼 수 없었지. 아니, 이제 생각해보니, 그 순간엔 뭔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확신했는데, 지나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네 모습을 조금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 의심처럼? 그래, 의심, 추측이라 할 수도 없는. 확신은 더더욱 아니고, 딱 의심. 왜 의심인지? 그건 동시에 나를 닮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차 안에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도로에 동시에 서 있을 수 있겠어? 그건 의심이 아니고 환상이 아닌지? 아니, 그곳에 서있던 게 내가 아니라… ‘그것’처럼 보였으니. 한치도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사물처럼 보였는데, 그게 나를 한없이 닮은 동시에 너를 한없이 닮았어. 그러니 그것이 나라고도, 너라고도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러니 그건 의심 그 이외의 것이 될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람은 거대한 사거리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거대한 현수막을 내건다. 자신도 그 사거리에 인적 자체가 드물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점멸 신호에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글로 쓴 자신의 현수막이 제대로 읽힐 일이 없음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담아 내건다.
‘이곳에서 무언가라도 목격한 사람은 연락주십시오. 01029707255’
그리고 타이틀보단 조금 작고 연한 글씨로 이렇게 적는다.
‘단,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를 설득시켜주시기 바랍니다.’
현수막이 내걸린 사거리는 고독이라고 불린다. 그곳의 자욱한 안개와 공기는 모든 사물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그 사람의 현수막은 막 내걸린 순간조차도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려진 현수막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연락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와서 말해봐야 소용 없을 것처럼 보일 만큼 현수막은 너무 낡아버렸으므로. 아무도 그것이 어제 걸린 것이라고, 심지어는 방금 막 내건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현수막은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곳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는 일은 한없이 무의미해보이므로. 그러나
짙은 연무 사이로,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안개의 틈으로, 희미하게 선율이 들려온다. 이내 노래가 시작된다.

새삼 나는 그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목격에 대해 말하지 못한 이유를 깨닫는다. 나는 도저히 첫 문장을 무어라 해야할지를, 어떤 말로 물꼬를 터야 할지를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문장도 작위적이고 불필요하고 어긋나고 모자라다. 그렇게 시작되는 문장은 결코 목격처럼 우연스레 일어나지 않기에. 목격은 원한다고 해서 일어나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목격은, 언제나 사후적이므로. 그것은 일어난 뒤에야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인식하게 되며, 결코 목격이라는 이름이 목격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기에. 그러니 목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이므로. 한없이 우연적인 것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는지.

곧이어 엘라가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비로소 나는 목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법한 말을 찾는다. 그러나 배운 대로라면 동사로 시작하는 문장은 명령문이므로, 나를 봐,라는 명령조로 들려야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목격에 대해서만큼은 그 무엇도 강요될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므로 첫 문장은 부탁이자 애원처럼 들린다. 나를 봐줘요. 나는 나무 위의 한 마리 고양이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이제서야 하는 너의 요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을 얻는다.
나를 봐줘요.
그것이 목격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건넬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침묵.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끊임없이 나를 목격해줘요… 다만 말에 연연하지 않고,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당신이 보는 그대로, 그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너와 나는 어떤 입장에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번의 이별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때, 너는 자책했다. 닥치고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까요? 나는 네게 장장 몇 페이지에 걸친 편지를 썼다가 지웠다. 후회하지 않고, 아쉬워할 것 없다. 그 편지는 다시금 시간을 초월해 지금 이 순간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라는 육신으로 깃들어 네게 전한다. 다만 말에 연연하지 않고,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당신이 보는 그대로, 그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한 번을 끝마친 노래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서,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나는 비로소 시간의 의미를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3차원 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축을 기준으로 몇 번 접히고, 하나의 사건은 나를 관통한다. 나는 내가 원치 않는 시간에,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시간에, 그리하여 불현듯… 시간이라는 사건을 단지 경험하듯, 그리하여 그 사건에 가담된 자들을 목격하듯…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똑같고, 만물이 그러한 법칙에 종속될 것이지만, 목격의 순간 내 시선에 포착된 너는 다르다. 나를 너에게서 발견하고, 그리하여 마주해야만 하는 나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초침은 자신의 운명이 다할 때까지 원판 위를 돌지만, 나는 그 원심력에 의해 원판 아래로 튕겨나간다. 그곳에선 무질서하고 서로 관통하는 초침과 분침, 시침과 달력, 날짜와 계절, 잊고 있던 년도와 시절을 발견한다. 나는 여기서 너를 발견하고, 너를 본다. 일순간 의심이 파고든다. 혹시, 이 모든 것이 타인을 거울 삼아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일까? 혹여나 그렇다 하더라도,
목격은 의도를 배제하는 행위이므로.
노래는 끝이 났지만 엘라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있다, 아마도. 어느 미국의 대도시에서 만연하는 봄을 찬양하는 갈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가르며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녀의 뒤로는 노이즈가 잔뜩 낀 흑백 영화가 재생되고 있다. 무성영화인 그것은 결코 아무런 음성을 갖지 못하지만, 그곳에 모인 수만의 관중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보다 빽빽하며,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그 무성의 밀도를 꿰뚫는 피아노의 단단하고 선명한 음들이 수직과 수평을 향해 동시에 뻗어나가며 노래의 전주가 시작되고, 그 모든 주파수를 보듬는 백색 소음은 안개가 되어 관중들 사이로 은밀히 틈입한다. 나는 그 중의 하나다. 무대의 멀찍한 곳 오른 편에서 까치발을 힘겹게 들고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와 나의 거리는 무한히 좁혀진다. 백색 소음을 머금은 자욱한 안개가 되어 거리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고, 나는 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거의 그녀의 주름을 셀 수 있을 정도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 거리를 단숨에 초월하여 나를 관통하는 건, 축축하고 젖은 안개를 헤치며 등장하는 엘라의…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너는 목격에 대해서 얘기해줘,라고 말하고 엘라는 노래하며,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나를 봐줘요, 목격이 우연적인 행위를 넘어 하나의 사건이 될 때까지.
나는, 사건은 이미 어느 시점에 일어났고 그것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통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요, 라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로소 벌어진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나무 위에서 벌벌 떠는 무기력한 새끼 고양이이고, 필요한 것은 오직…
노래는 또한번 반복된다.
Look a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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