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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Nov 12. 2023

초대

고독은 '나'만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상식적인 이해와 달리, 나를 지운다. 나라는 지위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밟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나는 기억을 입기 때문이다. 기억을 입은 나와 내팽개쳐진 나는 완전한 별개이므로. 그런 나는 가볍고 산뜻하다. 발걸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제공하는 지면으로부터 한 뼘 쯤 부유한 나는 유영하듯 걸을 수도 있다. 발이 필요 없다. 발을 갖고 있다는 기억이면, 그리고 그 발로 걷는 기억이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고독은 내게 곧장 자유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이곳으로 초대해야만 한다. 그곳에서만 나는 너를 무한히 사랑할 수 있고, 한없이 증오할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엔 기억이 나를 대신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다만 너를 사랑헀다고 기억하면 되고, 사랑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무한한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난 뒤에야 걸려온 너의 전화는,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조심스레 권유한 너의 초대는 나에게는 고독으로의 초대였으며,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기억처럼 다가왔다. 단지 이 표현에 상처받지 말길. 말은 너무나 불완전하므로, 나를 고독으로 초대한 너에게 고마워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을 뿐.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의 태도는 네게는 불안이겠으나 내게는 여남은 부분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므로. 그리고 너는 내게 묻는다. 최대한 조심스레. 하지만 모든 문장은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다. 어떤 언어는 말해진 순간 세계를 다시는 봉합할 수 없는 두 갈래로 분리해버리므로. 언어는, 말하지 않는 세계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하고 모종의 불안함을 잠재우려 시도할 때 불거지는 것이다. 어느날 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맛을 너무 제멋대로 표현해. 나는 맛잇는 커피에서는 볶음고추장의 맛이 난다고 말했고, 고수와 다른 어떤 음식을 동시에 먹으니 음식에서 타이어 맛이 난다고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으나, 그것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찰나의 순간에 창조되는 자신만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거나, 오직 행위로만 존재한다. 행해지는 순간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형태로. 그러니 내가 그러한 표현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최소한의 소통에 대한 예의이며 노력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 보여줬다면 넌 그 자리에서 씻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 그 언어는 침묵에 가까웠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만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우리의 관계 사이에 시종일관 맴도는 침묵을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나는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나는 커피에서 볶음고추장 맛이 난다고 말하던 순간에, 아주 찰나지만, 커피와 볶음고추장의 차이가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깡그리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다보면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도 덤으로. 그러므로 아무리 조심스럽게 말해지는 문장이라도, 그것은 조심성을 담을 수 없다. 그리고 너는 조심성을 가장한 태도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나랑 있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몇 년 전으로 돌아간다. 너는 각지고 네모난 싱글침대의 한켠에 앉아있었고, 나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 방을 미약하게 밝히는 등 바로 아래에 놓인 안락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몸을 찌그러트리기만하면 나를 온전히 받칠 수 있을 만큼 커다럤거나, 그렇다고 느꼈다. 나는 나를 잡아먹으려드는 질문들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그곳이 아니고선 방 한 칸 짜리 좁은 집에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곤 화장실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닥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아마 자신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고 난 다음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이후였을 것이다. 난 도대체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때 고독이 나에게 얼마나, 어떻게 필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답변 또한 온전치 못한 문장으로 끊어지듯, 라인에서 생산된 불량품처럼 툭 툭 튀어나왔다. 그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건 그냥 들어왔던, 보아왔던, 읽어왔던 숱한 단어들을 제멋대로 엮은 조잡한 새끼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고독을 알았더라면.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와 나는 너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의 고독에 대해 말해보려 시도한다. 나를 초대해준 너를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가 아는 고독의 세계로 너를 초대하고 싶었기에. 고독은 나를 지운다, 나를 지우기 떄문에 나는 자유롭다, 누구든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한번에 느낄 때는 소스라치게 몸이 떨리기도 하고, 동시에 끓기 직전의 피를 온 몸의 말단으로 밀어내는 심장박동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한없이 증오한다. 그러나 차마 이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나는 고독의 바깥에서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한 사람을 모욕하고 속였다. 대신 나는 최대한의 표현을 자제한다. 나는 말그대로 너의 맨몸을 보고 싶었고, 나의 맨몸으로 너의 맨몸을 가득 안고 싶었고, 익숙하지 않은 신체의 일부를 통해 너를 새로이 감각하고 싶었다. 그건 섹스와는 다른 행위이다. 사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의 욕망은 기행이나 변태성욕으로 보일지도 모를 만큼 감각에 충실하며, 충동에 순종한다. 나는 진실을 숨긴 대가로 모든 욕망 또한 숨긴다. 그저 너를 가만히 안고 있을 뿐이다. 이 순간 나는 고독하다고 말한다. 네 덕분에, 네가 나를 고독으로 초대한 덕분에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 너는 고개를 돌려 두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감긴 한 눈 중 네게 가까운 눈을 하나 뜬다. 뜨지 않은 눈이 모든 진실을 숨겨주길 바라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네게 고마움을 느끼며, 내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어보지 않는 네게 사랑을 느끼면서. 나는 어쩌면 고독 속에서 사랑을 말하는 법을 알게 될지도, 그리고 나의 고독 바깥으로 사랑을 갖고 나가는 법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을 지닌 채, 한 눈으로 너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내 고독의 품에 기억 하나를 건네주었다. 너를 사랑할 기억을.

너는 우리가 각자의 길로 돌아가고 나서야 뒤늦게 전화를 걸었다. 너는 나를 초대했다. 한 잔 더 할래.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너는 다시 내게 말한다. 그럼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나랑 한 잔만 더 할래.

네가 내게 안겨준 기억 속에서는 우린 갈라져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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