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 <카드 사기꾼> 외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그림 오른쪽에 앉은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젊은이는 어쩌다 이곳에 왔을까? 바람이 분다면 풍성하게 물결치며 살랑거릴 고급스러운 장식 모자를 쓰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 볼살이 통통한 얼굴이야. 게다가 저 목깃을 보렴. 실크 위에 색색의 실로 정성스레 수를 놓았네. 실크의 화려한 광택에 눈이 부시는 걸 보니 손 위에 올려놓고 호호 불며 키웠을 부잣집 귀한 도련님 같구나.
자신의 카드를 바라보느라 주변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는 방금 금화와 은화를 테이블에 올려놓았어. 어쩌면 멀지 않아 그가 지녔던 세상에 대한 순수함, 약한 자에 대한 동정심, 미래에 대한 소박한 여유까지 저 테이블 위로 올라갈지 몰라. 어린 그가 금화와 은화를 잃는 순간, 자신이 갖고 있던 소중한 것들이 그저 테이블 위에 배팅할 수 있는 칩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곧이어 속임수와 비열함이 횡행하는 거칠고 난폭한 세상이 보이고 명예와 우정의 유통기한을 알게 되겠지.
눈을 앞 유리창에 바짝 붙이고 앞만 보고 운전하던 초보 운전자 시절, 네가 유치원에 들어갔구나. 회의가 있는 월요일 아침, 늦잠을 자 머리도 묶지 못한 널 옆 좌석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서둘러 빠져나오고 있었어. 건물 모퉁이를 도는데 커다란 탑차가 보이는 게야. 급한 마음에 차가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고, 주차해 있던 차를 들이받았지. 넌 그 이후로 내 차를 타지 않았어. 버스 네 정거장 거리를 인도로 뛰어 유치원엘 갔어.
네가 유치원에 도착하는 걸 지켜보느라 지각한 날이었을 거야. 평소 9시에 턱걸이 출근하는 걸 준비성 없다고 생각했던 직장 선배가 전체 직원 앞에서 근무태도에 대해 크게 나무랐어. "아이 때문에..."라고 얼버무리자 "직장인의 기본자세가 부족하군요. 그런 변명 하려거든 당장 얘 돌보러 들어가세요." 하는 거야. 엄만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어. 압박붕대로 지혈하듯 힘껏 힘을 주어 간신히 눈물을 막았구나. 철철 피 흘리는 자존심은 물론, 섭섭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런데 이튿날, 아파트 동 입구에 그 선배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기억나지? 네가 좋아했던 프라이드 이모 선생님. 네 아침을 걱정하며 곧잘 김밥이나 머핀을 싸 오셨잖아. 널 간신히 세수만 시켜 차에 태우면 선배는 색 고운 머리끈으로 머리도 묶어 주었지. 차량 운행을 하는 유치원으로 옮기는 6개월 동안, 최대한 시간을 내어 널 데려다주었어. 잊지 못할 선배님이란다. 눈물을 쏙 빼는 날카로운 지적은 업무의 실수를 줄이게 했고 덕분에 일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지. 또한 선배의 객관적이고 냉철하고 직업적인 앞모습 뒤에 숨겨진 깊은 배려와 주의(注意)는 엄마의 얄팍하고 감정적인 인간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했어.
느루야, 인간관계가 고되지? 엄마도 아직 능숙하지 못하단다. 하지만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일,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 흘러가도록 잠깐 뒤로 물러나 있으렴. 너는 충분히 고려했고 살폈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가진 정보가 불확실하거나 네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거든. 전체가 보일 때까지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간섭에서 벗어나야 해.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그리고 또 하나, 느루가 기억했으면 하는 게 있어. 드 라 투르 <악사들의 난투극, 1610~1630>을 자세히 보겠니? 머리가 희끗한 두 노인이 팽팽히 맞서고 있네. 화면 왼쪽 노인의 오른손은 상대방을 당장이라도 찌를 듯 단검을 든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맞은편 노인은 왼손으로 거머쥔 플루트로 칼을 피하고 다른 한 손으론 상대의 눈에 레몬즙을 짜 넣으려는 듯 해. 마치 왼쪽 노인이 가짜 장애인 행세로 더 많은 적선을 받는 걸 미워하는 것 같아. 오른쪽 바이올리니스트와 꼬른뮤즈(cornemuse-17세기 관악기) 악사는 두 사람의 다툼이 한심한 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구나.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거리 부랑인들의 싸움이야. 낮은 자리에서 한 끼의 밥을 위해, 한 푼의 동전을 위해 자리다툼이나 하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이지. 드 라 투르는 화면의 구도를 상반신으로 잘라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초라한 그들의 다툼을 조명이 켜 진 연극의 한 장면처럼 부각시켰어. 부끄러움에 눈 돌릴 곳이 없지.
느루야, 우리의 삶 역시 이와 같지 않겠니? 더 고귀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행운으로부터의 적선을 조금 더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게 아닐까? 인간관계에서 기품을 갖는 건 서로의 이해(利害)에서 벗어나 멀리 바라보는 거야. 그렇다고 속으라는 얘기가 아니야. 문제의 핵심을 살피고, 정보의 공정함을 확인하고, 네 마음을 전할 때를 기다리자는 거야. 하긴 이렇게 통렬한 작품을 남긴 화가 드 라 투르도 그림이 아닌 삶에서 기다림과 품격을 배우진 못했었나 봐.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웠던 17세기, 프랑스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구나. 우리가 아는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엎치락뒤치락하던 그 땅 말이야. 몹시 시끄러웠던 로렌 지방은 나중 1634년 프랑스로 귀속되지. 드 라 투르는 제빵 공의 아들이었는데 어떤 경위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아. 바로크의 문이 열리고 카라바조의 명성과 악명이 유럽을 휩쓸었던 1600년대 초, 그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로 유학을 다녀왔어. 그의 그림에서 장식과 비유, 대조, 뚜렷한 키아로스쿠로 기법(명암대비), 그리고 화면 안에 빛이 사용된 것은 이 경험 때문일 거라고 해.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선 그를 '프랑스의 카라바조' 또는 '촛불의 화가'라고 한단다.
느루야,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촛불의 화가’였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 <목수 성 요셉, 1645>을 봐. 그림 속 앞치마를 입은 요셉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 발 아래엔 목공 도구가 놓여 있네. 어린 예수는 촛불을 들어 아버지 곁에 앉았어. 예수의 얼굴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아버지의 일을 거든다는 것이 몹시 자랑스러운 얼굴이야. 그 기쁨이 주위를 물들이듯 촛불을 든 손에서 빛이 새어 나오네. 세상의 빛이 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일까?
회화적 상상력이 얼어붙은 정확하고 사실적 표현은 드라이아이스처럼 작품을 차갑게 만들지. 하지만 드 라 투르의 탁월한 기량은 센티와 밀리미터까지 자로 잰 듯 주름살 하나 놓치지 않았음에도 화면에 따스한 온기를 부여했어. 빛을 내부에서 발광(發光)시켜 색채를 단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표현했거든.
화면 내부의 빛은 외부의 조명보다 대상을 더 부드럽게 보이게 해. 게다가 색채는 빛을 거스르지 못하지. 빛의 파편이 떨어진 만큼만 조심스레 대상이 드러나기에 거칠거나 튀는 색조차 힘을 잃고 풀이 죽어. 그러기에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LED 등(燈)을 100개쯤 켠 아우라가 있다고 한다면 드 라 투르는 촛불 한 자루로 경건한 명상을 통한 자기 성찰로 우릴 이끌어 간단다.
그는 결국 루이 13세의 눈에 띄게 되었어. 그의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이 13세가 자신의 침실에 있던 그림을 모두 치우고 그 작품 한 점만을 걸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야. 그에게 '궁정화가'라는 직함과 '경'이라는 호칭이 하사되었구나. 축복이었지. 그럼 드 라 투르의 여생이 '촛불 화가'라는 은유대로 고아(高雅)했을 것 같은데, 불행히도 그의 졸년(卒年)은 몹시도 흉포(凶暴)한 이야기를 남겼어.
느루야, 손에 거머쥔 부와 명예, 욕망을 지키려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을 보여줄게.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수려한 젊은이는 이 점괘가 맞을까 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숨기지 못하네. 젊은이는 점괘를 통해 미래의 혼란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절약하고 싶었겠지만 "글쎄, 틀림없다니까." 하는 듯한 점쟁이의 능수능란한 표정에서 그가 헛발질할 내일이 보여. 달콤한 말이 주는 당장의 기대에 취한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탐하는 손길도, 금줄을 끊어내는 여인도 보지 못하거든. 엄만 <점쟁이, 1632~35>라는 작품에서 드 라 투르의 내일을 엿보았어.
그는 일순간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로렌 지방의 부호가 되었고 재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쉴 새 없이 거칠고 사나운 분쟁으로 이어졌지. 주위 사람들에겐 인색했고 하인들에겐 악행을 일삼는 고약한 영주였어. 또 고성을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고도 해. 그는 농노들의 손에 죽었다고도 하고 흑사병으로, 또는 1652년 유행성 출혈열로 숨졌다는 말이 있어. 모두 불행한 결말이지. 욕심에 눈먼 악사처럼 그는 멈추지 않는 욕망의 단검으로 세상에 남아있는 아름다움을 찔렀어.
느루야, 우린 끊임없이 흔들리지. 모략과 배신과 누명, 비난에 고통받고 가난과 비겁과 나태와 불신에 분노하지. 하지만 다정함과 상냥함, 친절과 배려, 헌신, 나눔, 이해와 같은 인간만이 가지는 고귀한 특별함도 있단다. 경계에 서 있기에 위태롭고 자신을 지키기에 너무도 초라한 우리지만 인간을 구원하러 온 예수도 이렇듯 연약하고 가난한 모습이었단다. 속았다고 생각하기 전, 삶의 다양한 모습 또한 커다란 스승이니 배운다고 여기면 어떨까? 살아보니 한 살 한 살 나이가 든다는 게 더하기 같지만 실은 빼기더라. 자꾸 덜어내어 속이 비어야 세상과 공명할 수 있더구나. 너의 지금이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친구와 동료의 마음이 섭섭할지라도, 빈 마음으로 다시금 친구를, 동료를, 선배를 믿어보지 않겠니?
세상에 닳고 물색없이 늙어버린 엄마가 다시 서고 싶은 자리는 압력과 시간에 의해 굳어진 화석 위가 아니란다. 넘치는 활력으로 옹색한 변명 따윈 멀리 던져버리는, 시기와 질투와 속임수를 하찮게 여기고 흔들리는 자신을 믿는, 곁에 있는 이를 스승 삼아 기어코 어제보다 더 성장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서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