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농담 56. 김준근 <광대 줄 타고>
거름망으로 내린 빛이 유리창에 도달합니다. 명랑하게 댕그르르 떨어집니다. 조각조각 빛나는 투명함이 폭풍과 장마를 견딘 유리창을 어루만집니다. 제때 세안을 하지 못한 아파트 유리창은 조금 부끄럽습니다. 추석이 가까이 오니 아무래도 새 단장이 필요합니다. 명절은 축제니 까요. 특히 가을에 있는 추석은 왠지 여유롭습니다. 우리의 주머니가 비고 장바구니가 헐해도 한숨은 담지 않기로 합니다. 절대!
추석에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풍속화 한 장 볼까요?
한말 풍속화가인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은 삶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신비한 화가입니다. 1886년 부산 초량에 살면서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 풍속을 그려주었고, 선교사 게일(Gale, J. S.)을 따라 원산에서 <텬로력뎡>의 삽화를 책임졌다고 알려졌습니다. 특이한 건 그가 그린 <텬로력뎡>의 삽화는 기독교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조선의 얼굴과 의복을 하고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번역한 자신의 작품세계였다 하겠습니다.
그가 그려 남긴 1,200여 점의 작품들은 주로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 등 외국에 있습니다. 추석에는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환하게 웃고, 맛나게 먹고, 즐겁게 놀아야 하니, 그중 보기만 해도 신나는 <광대 줄 타고, 19세기말>을 소개합니다.
마당 한복판에 사당패가 왔나요? 사당패는 우리 옛 시대의 엔터테인먼트였지요. 마땅한 오락이 없던 시절, 벅구장단에 맞추어 추는 사당벅구춤, 민요를 중심으로 한 소리판, 재담과 노래를 하며 보여주었던 아찔한 줄타기로 민중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벌써 삼현육각의 합주가 흥을 돋울 준비를 하고 있네요. 삼현육각은 향피리 2. 대금, 해금, 북, 장구로 짜인 일종의 관악기 편성입니다. 북채를 잡은 고수가 지휘자입니다. 그의 리드에 따라 현장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래도 줄을 타는 놀이패이다 보니 유려한 선율이 아닌 관객의 흥을 돋우고 위기를 절정에 치닫게 할 연극적 요소가 중요했겠지요. 고수는 판소리 때와는 달리 북 밑에 받침대를 두었네요. 전 북이나 장구의 리드미컬함도 좋지만, 향피리의 높고 간들간들거리는 소리가 합주의 묘미라 생각합니다. 김홍도의 <무동>에서도 이와 같은 합주단이 나오지요.
X자로 엇묶은 작수목 사이로 광대가 긴소매를 펄럭이며 줄을 타고 있습니다. 줄광대는 줄을 잘 타는 기예만으로는 1급 광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재담이 필수지요. 땅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어릿광대와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주거니 받거니 하며 관객들의 간을 쫄깃쫄깃 눅신녹진하게 해야 제대로 된 한 판이 됩니다. 어릿광대의 뒤로 젖힌 품새와 입술을 보세요. 신명 나는 추임새가 쩌렁쩌렁합니다.
김준근 작품의 특징은 주로 배경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동작을 하는 인물만 집중적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조금 아쉬운 건 인물들의 얼굴이 비슷합니다. 점 하나로 각기 다른 표정을 살렸던 김홍도의 탁월한 역량에 다시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말 즈음의 그림이어서인지 관객 중 분홍색 웃옷을 입은 소년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서양안료가 들어왔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이어 주로 젊은 여인들로 구성된 사당들이 부채를 접었다 펼치며 춤과 노래도 했습니다. TV도 영화도 없던 시절, 마을에 아이돌이 뜬 거지요. 인기라면 방탄소년단, 뉴진스 '저리 가라'입니다. 좌중의 들썩임과 추임새가 폭발합니다. 사당패의 주요 악기는 삼현육각이 아니라 소고였습니다. 작고 손안에 들어오지만 혈통은 '북'이었으니 나름 포스 작렬입니다. 양반들의 주머니가 열리길 촉구하는 카운트 다운은 뒤의 소고가 맡았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아리따운 사당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관람료(걸립)를 걷습니다. 돈이야 가장 좋은 것이었지만 쌀도 받았고 과일이나 다른 물건도 통용되었습니다. 마을에 논답이 실하고 인품이 너그러운 어른이 계시면 되도록 많은 것을 내놓아 그들의 흥에 보답했고 유랑의 삶, 가난한 시간을 위로했습니다. 김준근이 촘촘히 기록한 조선말의 사회는 지금의 우리에게 그리움을 남깁니다.
걸립처럼 추석엔 격려의 용돈이 오갑니다. 가족과 친인척이 모여 덕담도 나눕니다. 갈수록 사라지지만 아직은 풍속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미덕이라 여깁니다. 명절은 주위를 살펴보는 시간이니까요. 근대가 낳은 '개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주체성을 담보하기에 황홀하기도 하고, 이어내려 온 관계에 말뚝을 박기에 슬프기도 합니다. 각자 산다는 말, 외로운 말입니다.
추석 연휴엔 소원(疏遠)했던 이에게 '벙개' 어떻습니까? ^^
PS : 이번 주는 우리 가락의 정서와 떨림을 전해주어 제가 홀딱 반한 서도밴드의 노래 가져 왔습니다. <사랑가> 들어보세요.
"많이 먹고 살 안찌는 추석, 사랑 주는 추석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