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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Oct 15. 2024

오페라 부파와 귀족의 몰락

10월의 오페라 2

  10월의 오페라 두 번째입니다. 지난 회 마지막에 진지했던 오페라 세리아의 시대가 가고 유쾌한 코미디극 형식의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시대가 온다고 말씀드렸지요? 


  처음 오페라 공연장은 다층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 귀족들은 2층 자신의 공간에 초를 500개 또는 700개를 켜는 식으로 재력과 신분을 과시합니다. 1층은 평민들이 이야기도 하고 공연도 보는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의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평민들의 관람이 많아지면 질수록 오페라는 연극적 요소가 강해지고 바로크의 지나친 기교주의를 벗어나 '음악의 독립성'을 추구하게 되었지요. 


  18세기 초, 나폴리에 등장한 오페라 부파는 정가극에서 훨씬 더 인간적인 주제와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것을 말합니다. 긴 오페라 세리아 공연을 할 때, 막과 막 사이에 희가극 형태의 짧고 코믹한 막간극이 공연되었습니다. 그것을 '인테르메초'라고 불렀어요. 이 인테르메초가 날로 관객들의 인기몰이를 합니다. 고급 음식점에서 메인 디쉬보다 애피타이저나 후식이 더 맛있어 그게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제 막간극이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상연되기에 이릅니다. '음악 안에 코미디' 였던 것이 '코미디 오페라'가 된 것이지요. 민요에서 기본 악곡 형식을 취했고 빠른 레치타티보가 특징입니다. 


페르골레시 <마님이 된 하녀> 중


  1733년 작 <마님이 된 하녀>도 <자부심이 강한 죄수>라는 오페라의 인테르메초였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G.B. 페르골레시가 작곡하여 독립시켜 상연된 것입니다. 현명한 하녀가 어리석고 돈 많은 노인 우벨트에게 기지를 발휘해 마님이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당시 시민들이 공연이 끝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요. 지금 임영웅의 '사랑은 늘 도망가' 인기 정도였을까요?


  1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가 '피가로의 3부작' 중 1부인 <세비야의 이발사>를 써서 1775년 연극으로 초연했습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마드리드에서 마음에 쏙 든 여인을 본 알마비바 백작은 그녀를 사귀려고 세비야까지 따라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지나'. 하지만 그녀는 그녀와 결혼해 젊음과 재산을 자치하려는 후견인 '바르톨로'라는 늙은 의사로 인해 집 밖에도 혼자서는 나갈 수 없습니다.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를 연결하는 이발사 '피가로'의 유쾌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연극 대본을 토대로 조반니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가 곡을 붙여 178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하지요. 대박이 납니다. 대단한 인기로 유럽을 순회할 정도였으니까요. 


  나중 오페라의 거장,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는 이 곡을 재해석해 초연하고 싶은데 파이지엘로의 위세가 무서워 변두리 극장에서 공연합니다. 파이지엘로의 팬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고양이를 풀기까지 했습니다. 극장 안이 엉망진창이었지요. 하지만 롯시니에게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나 봐요. 파이지엘로가 1816년 사망하고 말지요. 두 달 후 당당히 롯시니가 공연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희극 오페라이자 가장 즐겨 부르는 아리아이기도 한 <나는야, 마을의 만능 일꾼>은 너무나 유명한 노래지요. 오페라를 1도 모른다는 분도 이 곡은 들어 보셨을 거예요. 의외로 우리가 많은 오페라 곡을 안답니다. 들으면 "아~ 저 곡!" 하실 곡이 많아요.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중 '나는야, 마을의 만능 일꾼'


 

  이 오페라의 후편에 해당하는 곡이 근대를 맞이하는 격동의 시기에 계층의 모순과 인간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입니다. 1786년 5월 1일, 빈에서 초연했지요. 모차르트 답게 목관악기가 부드럽게 멜로디를 연주하는 파격을 선보입니다. 또 관행적으로 아리아(aria) 중심이었던 오페라를 레치타티보(recitaitvo)가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도록 작곡에 변환을 일으킵니다. 현대적인 뮤지컬의 시작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를 제대로 알려면 그의 오페라를 들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하나하나가 모두 최고의 작품입니다. 모차르트는 클래식의 정수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오페라에서도 육중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니까요. 


  <피가로의 결혼> 중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불고'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 듀플레인이 교도소 내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명장면으로 더욱 유명해진 곡입니다. 모두 다 들어보셨고 익숙한 곡들일 거어요.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중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하늘에 피운 모닥불처럼 전체를 물들이고 순간 사라져 버린 모차르트에게 좀 더 귀를 열어 볼까요? 18세기 후반, 이탈리아 중심의 오페라는 독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탈리아어가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이라면 독일어는 구운 비스킷 같잖아요. 당시 독일어는 부드러운 오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모차르트에게 독일어로 된 오페라 작곡 의뢰가 들어옵니다. 독일에서는 '징슈필 Singspiel, 노래와 연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성행할 때였어요. 


  비스킷에 휘핑크림을 얹은 천재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입니다. 프리 메이슨의 정신을 담아 만든 작품이지요.


영화 <아마데우스> 중 마술피리의 '밤의 아리아'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 대해 숙명적인 적의를 느낍니다. 그는 인간의 재능이 빚은 수재였고 따라서 신이 내린 축복의 세례를 받지 못했지요. 슬프고 고독한 그의 뒷모습이 마지막 시퀀스였습니다. <마술피리> 중 한 곡 더 듣겠습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파파게나와 파파게노>

 

  이제 오페라 부파 시기의 회화, 소개합니다. 18세기의 회화는 우리 눈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요. 바로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위로 귀족들의 화려한 로코코 문화가 반짝이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어둡고도 빛나고 가장 진중하면서도 경박한 시기입니다. 귀족들은 금화가 반짝이는 만큼 신분이 쇠락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지키려는 것과 빼앗으려는 것의 대립이 극렬해지면서 둘의 거래가 시작되기도 하지요. 


토마스 게인즈버러 <앤드류 부부의 초상, 1750년 경>

    

  게인즈버러(Thpmas Gainsborough, 1727~1788)는 풍경화가였습니다. 한 세대 뒤 낭만주의 화가였던 존 컨스터블과 같은 영국 서퍽주 출신입니다. 서퍽주는 자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요. 오죽하면 컨스터블은 평생 고향의 풍경을 잊지 못했고 고향의 구름을 그려 '구름의 화가'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 아름다운 고향을 둔 게인즈버러는 어렸을 때부터 드로잉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런던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항상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 했지요. 하지만 모직물 생산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 역시 생계를 위해 고교 친구였던 로버트 앤드류와 그의 부인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래서 풍경화도 아닌, 초상화도 아닌 독특한 작품이 되었지요. 


  부부는 캔버스의 끝 간 데 없이 뻗은 토지의 주인입니다. 앤드류의 집안은 식민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상류층만이 입을 수 있는 사냥복을 입고 장총을 끼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대지주 집안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옆의 아내인 프랜시스 카터 집안입니다. 땅은 잴 수 없을 만큼 넓었고 부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만큼 부부의 거리도 멀었던 것 같습니다. 화면 속 부부의 표정은 다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가 가져온 지참금을 생각하면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될 텐데"하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동안은 귀족과 귀족의 신분적 결합에서 대지주와 대지주의 연대로 사회는 변했고, 자본의 성장은 영락한 귀족과 부유한 상인의 협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호가스는 명예나 품위를 잃어버린 시대를 그렸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주저앉는 사회를 풍자했습니다. 이미 소개한 적이 있으니 그림만 간단히 보겠습니다. 


윌리엄 호가스 <결혼 계약, 1750>


  사회변화의 바닥엔 쇠락의 징조를 보이는 왕과 신분제가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고도비만에 나이 든 사자처럼 무기력하고 나른해졌습니다. 그들의 시력은 약해졌고 발톱은 빠졌습니다. 로코코로 대변되는 1750~1800년 경,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가 그린 <금발의 오달리스크, 1752년 경> 보겠습니다.


프랑수아 부셰 <금발의 오달리스크, 1752년 경>


  루이 15세의 정부였다는 마리 루이즈 오 머피(Marie-Louise O'Murphy, 1737~1814)입니다. 앳된 소녀지요. 그녀의 천진하고 무지한 표정으로 인해 더욱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줍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이 그림을 보고 루이 15세에게 실물을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물론 이 소녀는 그야말로 '입궁'했습니다. 화려한 정원과 금과 보석으로 둘러싸인 궁엔 퇴폐와 향락이 가득했습니다. 궁의 담장은 높아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은 보이지 않았지요. 


  18세기 유럽엔 절정으로 치달은 소수 귀족의 향락과 이웃의 땅과 바다에서 금화를 거두기 시작한 신흥 지주의 욕망과 노동으로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굶주리고 헐벗은 대다수 평민의 분노가 뒤섞였습니다. 그중 누군가는 주먹을 쥐기 시작했지요. 예술이란 시대의 아들이니 그림은 '로코코'라는 이름으로 오페라는 '부파'라는 형식으로 자기의 길을 찾기 시작했지요. 


  다음 주엔 19세기의 오페라를 소개하겠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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