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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Sep 27. 2020

초점을 맞추는 것

Focus on something



 나는 예전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얕은 관심을 내비치는 걸 좋아했는데, 요즘은 미러리스 카메라에 꽂혀버렸다. 성능이 썩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까지 묘하게 주인을 닮은 Canon EOS M50은 약 1년 전쯤 큰 맘먹고 구매한 카메라다. 덜렁거리는 주인 탓에 덮개를 몇 번 잃어버리고, 무지한 주인이 그냥 Auto 모드로만 사용해왔으니 제 나름의 불만이 많았을 테다. 이제야 겨우 화이트 밸런스, 조리개 따위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조금씩 변형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카메라는 정말 미지의 세계다. 알면 알수록 현실을 좀 더 신비롭게 담아낼 수 있게 된달까. 각설하고, 카메라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Focusing’ 기능 때문이다.



 Focusing/Out-Focusing은 이제 웬만한 휴대폰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흔한 기술이 되어버렸지만, 카메라가 잡아내는 초점은 휴대폰의 초점과는 확실히 다르다. 원하는 부분에 집중하면 배경 혹은 그 나머지 것들을 완벽하게 흐릿한 형태로 바꿔버린다. 초점을 잡기 위해 담아내고자 하는 부분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의 형상이나 성질이 눈에 띈다. 어느새 흐릿해진 주변의 배경 사이로 홀로 선명히 빛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가 큰 그림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가령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 나무들을 뒤로한 채 이제 막 나무 기둥 끄트머리에서 자라나는 벚꽃 네 송이나, 호수와 집들을 뒤로한 채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하나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흐릿하게 바꿔버린 거대한 것들 사이에 자리 잡은 선명한 작은 꽃과 나뭇가지는 내게 생명이나 삶, 새로움, 소중함, 변화 따위의 것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이런 Focusing, 즉 ‘초점’을 두는 과정은 비단 카메라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온라인으로 듣고 있는 대학 강의만 봐도 교수들의 다양한 초점이 눈에 보인다. 어떤 교수는 교과서적인 이론에, 어떤 교수는 다양한 기업의 사례에, 어떤 교수는 학생들의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이론에 초점을 둔다면 그 원리의 시작이자 배경이 되는 출발지점을 알 수 있으니 좋고, 사례에 초점을 둔다면 이론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한 실무적인 요소를 엿볼 수 있으니 좋고, 학생들의 참여에 초점을 둔다면 쌍방향적인 소통을 중심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어필할 수 있게 하니 다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 물론 단점도 존재하지만, 굳이 하나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며칠 전부터 손을 대기 시작한 알베르 카뮈의 책, <페스트>를 읽으면서도 계속 ‘초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2부 중간쯤 진입한 책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전염병이 퍼진 상황에서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진다. ‘시민의 안전’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이 상황이 전염병이든 뭐든 간에 사람들이 위험성을 인지하도록 안내하고, 이를 위한 예방책 및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행정적 처리 및 민심’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최대한 이 전염병을(페스트나 사스, 코로나 19처럼) 명명하지 않고 싶어 하며 최소한의 예방 수칙과 권고 사항만을 전달하고자 한다. ‘사람들의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전염병이 진행되면서 일정한 패턴을 지닌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고 마을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기록한다. 같은 사회, 같은 상황 속에 있어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태도가 달라진다.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 페스트 서평이 궁금하다면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 이전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한 걸까. 자아실현? 사랑? 돈? 명예? 지식? 권력? 존재 자체? 다른 이들은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을까. 남들의 시선도 궁금하고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내 초점도 궁금해진다. 과연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고민해보던 중 이 고민 자체가 ‘존재’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타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결국 그 시선을 지닌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일 테니까. 어쩌면 난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게 내 삶에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자아실현은 모든 인간의 목표이고, 성별을 막론한 사랑 역시 필요하고, 돈이야 언제든 필수적인 존재고, 명예는 얻어서 나쁠 것 없고, 지식은 늘 부족하고, 권력은 (쥐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만) 맛보고 싶은 욕망이 존재하며 25년 내내 내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니 계속해서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생,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떠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다양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 보련다. 하나하나 깊게 바라보고 고민하고 탐구해보면서 이 세상 속의 나를, 내 안의 나를 마주해볼 테다. 내 모든 것들이 지닌 형상과 성질, 의미를 인지하고 떠나갈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춘 것은 4K, 나머지는 144p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 중인 4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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