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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Jul 21. 2020

어느 놀이공원에서는

분명 어디엔가 존재할 패배자들의 성지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코로나 19의 눈치를 보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던 학교는 결국 다른 학교들보다 한 달 정도 늦은 3월 30일에 개강을 결정했다. 이 시국의 흐름에 걸맞게 온라인으로. 사실 나는 썩 훌륭한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 개강을 두 손 두 발 들며 환영했다. 학교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으니 조금이나마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육체적으로 편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수업의 현장감이나 타 학우들의 반응을 느낄 수 없으니,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중압감이 더해졌다. 스무 살 때부터 줄기차게 미뤄온 전공 여섯 과목을 실시간 화상 미팅으로, 그중 세 개는 원어 강의로 듣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여튼 미래의 나한테 미루는 일은 참 잘한다. 이런 쓸데없는 데 뚝심 있는 년 같으니. 물론, 이건 내가 경영이랑 거리가 먼 학생이자 사업자라 그럴 수도 있다. 사업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래서인지 뭔가 미묘하게 더 바빠졌다. 3월 말까지만 하더라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여유로운 일상이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계를 보면 어느새 13시, 19시, 2시가 되어있다. 이런 순간에는 내가 이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못 쓰는 인간이었나 싶어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요즘은 예전에 블로그에 대충 싸질러뒀던 서평들을 홈페이지로 다시 정성껏 옮겨오는 작업을 하고 있어 책도 잘 못 읽고 있다. 예전에 써뒀던 서평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정말 허접한 글이다 싶기도 하고, 이런 생각도 했었나 싶어 놀라다가도 어쩌면 이 시절의 내가 지금보다 열정적이고 순수했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쓰는 것들이 뻔하디 뻔한 기성품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화면에서 깜빡거리는 파란색 커서를 바라만 보는 일이 잦아졌다. 뭐라도 빨리 써내라는 듯 1초 간격으로 재촉하는 커서를 바라보면 불안함과 함께 공허함이 찾아온다. 이 백색의 공간에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을 것만 같고, 대체 어떤 것을 채우고 싶어 이 창을 열어놓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이 솔직하고 가벼운 것인지, 진중하고 무거운 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에 신중해야 하는지, 내가  길로 먹고살  있을지, 아니 애초에 내게 나를 믿을 최소한의 용기라도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이런 좌절로 가득 찬 망상의 끝을 달리다 도착한 곳은 분명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음산한 놀이공원. 가로등조차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상한 공간. 그 안에서 나는 다양한 것들을 마주한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단면, 가난과 빈곤, 위선과 악의, 누군가에게 선망받지 못하거나 외면받는 자들의 외침  이런 암울한 것들을 말이다. 이들은 회전목마에도 관람차에도 바이킹에도 롤러코스터에도, 하다못해 낡디 낡은 화장실 변기 위에도 앉아있다. 어떤 것은 녹슨 형태로, 어떤 것은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면서, 어떤 것은 칠판 긁는 소리나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너는 뭐하러 여기  거야?”     






 이들의 형태는 분명치 않다. 이곳에서 오롯한 형상을 지닌 건 나밖에 없다. 어쩌면 모두 각각의 모습을 지녔지만 내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조커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삐에로가 풍선 같은 것을 들고 돌아다니는데 그 안에는 반짝이나 헬륨 대신 하얀 가루들로 가득 차 있다. 삐에로는 돈도 받지 않고 모두에게 풍선을 하나씩 나눠준다. 이들은 풍선을 받아 터뜨리고, 마시고, 공중에 흩뿌려댄다. 내 손에 쥐어진 이 불투명한 풍선을 바라만 보다 하늘로 날려 보낸다. 그럼 이 풍선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찾아갈 테다. 그것이 이곳의 자연이자 섭리이니까. 이곳에 모인 자들은 여기저기서 하고 싶은 말들을 필터링 없이 지껄이고,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고,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놀이기구에서 뛰어내리고, 비눗방울 대신 칼을 휘두르고, 담배인지 약인지 모를 연기를 내뿜어댄다. 어디에선가 패배자라 불리는 자들이 모인 이곳에서는 모두가 승리자이자 영웅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싸우지 않는다. 다른 이가 무얼 하든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싸지르는 말은 알고 보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고, 던지고 깨부수는 것도 자신의 물건이나 마음이며 어디서든 뛰어내리는 일도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다. 칼을 휘두르더라도 그 끝이 상대를 향하지 않으며 자욱한 연기를 아무리 들이마셔도 답답하지 않다. 밝고 희망찬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이 음산한 놀이공원만큼 마음 편한 곳이 또 있을까. 나는 구석구석을 누비며 돌아다니고, 누군가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외침에  기울이고, 누군가의 깨부숨에 손뼉 쳐주며 누군가의 자유낙하를 응원한다. 마음대로 시작한 삶이 아니라면, 끝이라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어야 할 테니.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이 암흑의 놀이공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현실 세계에서 내가 이러거나, 이런 일들을 말리지 않았다면 기물파손죄나 상해미수나 방관죄 등으로 잡혀 들어가겠지. 아마 머지않아 경간부가 될 내 동생이 날 체포해 가둬버릴 게 뻔하다. 내 동생은 나와 달리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이성적인 인간이니까.






 망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다시 책상 위로 돌아온다. 주변은 고요해지고, 깜빡이는 커서와 스탠드 불빛이 날 반긴다. 반기는 건지 빨리 꺼지라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 두 곳의 극명하게도 다른 분위기에 헛웃음이 나온다. 언젠가 이런 놀이공원을 만드는 게 소망 중 하나라고 말하면 다들 미친 소리라 하겠지. 괜찮다, 난 좀 미친년이니까. 글이든 술이든 책이든 이상이든 허구든 무엇 하나에는 분명 미쳐있는 년이니까.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만의 음산한 놀이공원을 만들 테다. 행복과 사랑 대신 한이 서려 있는, 억울함이든 분노든 서러움이든 뭐든 털어놓을  있는 그런 놀이공원을. 이야말로 진정한 ‘놀이 가능한 공간이  테니.




내가 보정한 여행 사진. 아마 놀이공원은 이런 형상을 취하고 있지 않을까.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 중인 4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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