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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Dec 22. 2020

세상의 진리, 양면성

그것이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삶의 뒤편에는 숨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는 죽음이 상존하고 행복을 마주하면 고통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며, 달콤함을 느끼면 왠지 모를 씁쓸함이 찾아오곤 한다. 하다못해 동전마저 앞뒤가 다른 세상. 위대한 선조들은 이를 ‘전화위복’이니 ‘새옹지마’이니 하는 멋스러운 말들로 표현했지만, 내 짧은 식견으로는 그저 ‘하나 가고 하나 온다’라는 표현에 그친다. 그게 그거고, 저게 저거 같은 똑같은 세상. 어차피 마주할 시작과 끝은 뭐 하나 다를 게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죄다 선하고 악한걸.






 하긴, 생각해보면 ‘양면적’인 성질은 비단 만물이나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에 겪었던 가장 양면적인 것 중 하나는 ‘공간’이었다. 집 앞을 오가며 마주하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고깃집. 이곳은 극단적인 장단점이 존재하는 곳이다. (고깃집뿐만 아니라) 단순한 육체노동만을 요구하는 이곳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멍한 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는 데 바쁘니 뇌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할 틈이 없다. ‘힘들고 고되다’는 육신의 신호만 느낄 뿐, 내 삶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꾸덕한 가식으로 범벅진 탈 하나만 뒤집어쓴다면 이 구역의 친절함을 대표할 수 있고, 사회생활은 물론 대인관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게 타인을 마주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밤새 뇌를 괴롭히며 글 쓰는 것보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인가.






 그럼에도 인간은, 특히 나란 인간은, 상당히 간사한 존재이기에 이런 장점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기초적인 체력도 부족할뿐더러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보니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반복한다. 꼭 일할 때 글감이나 소재가 생각나고, 미친 듯이 창작 욕구가 불타오르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까먹어버린다. 이건 내가 멍청한 탓인지, 공간이 주는 부정적인 힘의 탓인지는 모르겠다. 고객으로 앉아있는 타인의 한 끼니가 내 일당보다 높다는 걸 생각하면 왠지 모를 패배감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가끔가다 들려오는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는 식의 경멸이나 조롱의 메시지를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에 화가 나기도 한다. 정말 인생에 쓸모없고 도움 안 되는 말들은 어찌 그렇게 귀에 쏙쏙 박히는지. 이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아주 조그만 공간의 대표자임을 인지하는 순간 찾아오는 자괴감 따위의 감정은 정말 소름 끼치도록 엿 같다.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는데 돈에 얽매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공간인가.






 이런 인지 부조화의 늪으로 가득 찬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방황하던 어리석은 인간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이제 어느 공간이든 ‘안락함’ 따위로 귀결되는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만을 선사해주는 곳은 없다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곳이 도서관이든, 카페든, 학교든, 사무실이든, 병원이든, 집이든 간에 나를 온전히 편안하게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모든 건축물 안에서 마냥 행복하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본연의 모습을 자랑하는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었으니까, 아니 정정. 인간이 자연에 무언가를 원했으니까 우리네 삶의 터전이 이런 인위적인 공간이 되었겠지. 자연이 선사하는 대가 없는 무한한 공간으로 들어간다 한들, 그 안에서 인간은 또다시 다른 것들을 원하게 될 테고 결국 그 공간은 태초의 것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공간으로 변모할 테다. 그렇게 된다면 양면적인 것을 세상에 하나 더 내놓는 것 말고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냥 주변에 널려있는 흔하디흔한 또 다른 공간 하나가 탄생하고 말겠지.






  아, 이 작은 육체 하나 마음 편히 눕힐 공간이 없다. 번뇌와 잡념, 고민과 허상, 피로와 환멸이 자리 잡지 않은 공간이 단 한 곳도 없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공간의 문제인지 인간의 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아무 기능도 없는 순수한 뇌를 지닌 게 아니고서야 소소한 고민거리 하나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고요하고도 잔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찌 보면 양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일 테다. 비가 내린 후에는 구름이 걷히고, 지독한 밤이 지나면 활기찬 아침이 찾아오며 사랑이 무뎌지면 이별이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이 세상이 하늘과 땅, 물과 불로 분류되어 있으니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양면적인 것들은 당연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끼어있는 나는 무엇으로 분류될 수 있을까. 회색분자를 지향하며 살아왔더니 정말 어중간한 존재가 되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걸 보니 세상은 꽤 공평한가 보다. 이런 공평함까지는 원하지 않았는데.



자연과 인간은 이분법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5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43. 5월 18일(월)
오늘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입니다.
국회에서는 북한과 연관된 가짜뉴스로 인해 5·18 역사왜곡처벌법을 제정하겠다고 하던데,
가짜뉴스를 막는 것도 좋지만 숭고한 희생을 바친 이들에 대한 추모가
좀 더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수많은 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원고를 송부합니다.
모두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 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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