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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Jun 21. 2021

죽음을 마주하는 것

'죽음'을 선택해 자유로워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며칠 전 모친의 친구분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셨다. 내 동창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분은, 직접 만나 뵈었던 적은 없지만, 정말 밝고 긍정적이었던 분으로 기억하는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고 하더라. 밝은 만큼 짙은 어두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발인 날 소식을 접해 들은 모친은 잠시 지방에 내려가 계신 탓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 동창과 친하지 않고, 연락처조차 없었던 탓에 최소한의 예의라도 차릴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과 그 동창이 조금이라도 빨리 마음을 추스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양친의 주변에서 슬픈 소식이 많이 들려왔었다. 몇 달 전 부친의 지인이 별세하셨는데, 2층짜리 이자카야 건물에서 술을 마신 후, 난간에 기대있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는데 하필 머리 쪽을 다치셨다고 한다. 한 마디로 ‘실족사’였다. 소식을 접해 듣고 조문하러 다녀온 부친은 세상이 이렇게 허망하다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떠나갈 수 있냐며 비통해하셨다. 얼마 전에는 모친의 절친 중 한 분의 남편께서 별세하셨다. 그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울던 모친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알고 보니 남편분은 위암을 앓고 계셨고, 친구분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 모친은 혼자 남은 친구분과 아이들을 걱정하다가, 마음고생 했을 친구분을 생각하며 속상해하다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아마 그 친구분의 아이들이 우리 집 아이들과 같은 나이라 더 그러시지 않았을까. 이렇게 죽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많은 사람의 눈을 적시고 돌아간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내일 먹고사는 일에 급급할 뿐, 누군가가 혹은 나 자신이 갑작스레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는다. 하기야 그 암울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존재를 매일 생각하고 사는 것도 이상할지 모른다. 사실은 늘 우리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친구인데 말이지. 어찌 보면 인생의 동반자는 가족이나 친구, 배우자나 반려동물이 아닐지 모른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마지막까지 본인 곁에서 떠나지 않는 존재는 죽음뿐이니, 인정하기 싫더라도 우리네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는 죽음일 테다.


 죽는다는 건 겪어보지 못해서 어떤 기분인지,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어딘가로 향하는 것인지, 수증기처럼 그 자리에서 증발하는 것인지, 또 다른 생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이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 중학교 동창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삼 년 가까이 되고 있다. 군 복무 중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는데, 찾아가야지 다짐만 하고 아직도 그 친구가 안치된 곳을 찾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데. 어느 날 하루는 그 친구를 위해 비워두고 꼭 만나러 가야겠다.






 내 단기적인 꿈 중 하나는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것인데, 습작 중인 작품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내 주변에서 목격한 죽음, 내가 생각한 죽음, 죽음의 여러 의미, 물리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 죽음이 가져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담아내고 싶었다. 아직 죽음에 대한 무엇인가를 풀어내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한 모양인지 중간중간 많이 막히지만 조금씩 써 내려가고 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데 죽음을 논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죽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조금이라도 죽음을 떠올리고 대면한다면 떠나는 이도, 남겨진 이의 고통도 조금은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아주 슬프게도, 정말 말도 안 되는데 백업해 둔 파일이 날아갔다. 애플 진짜 고소한다 내가... 물론 돈 없어서 고소도 못하지...)






 나는 아직 진지하게 죽어야겠다고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언젠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한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이나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죽음에 이르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자의 마음은 얼마나 망가져 있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번 그들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이 끊기질 않는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들,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자들, 자신이 망가져 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자들,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사라진 자들을. 그 수는 얼마나 많으며 그들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를 떠올려보면 다시 마음 어딘가가 콕콕 찔린다.  






 배달의 민족에서 새로운 후원 캠페인을 (2020년 8월 당시) 시작했다. 홀로 사는 노인분께 우유로 안부를 묻는 과정인데, 문 앞에 우유가 쌓여있을 경우 그분의 안부를 물어보자는 취지다. 처음 보고, 유당불내증을 겪는 한국인이 많으니 차라리 우유보다 즉석밥이 낫지 않을까 하는 약간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만, 취지가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배달할 때 평균 2만 원 정도 드는 것을 고려한 것인지 후원 금액도 2만 원이더라. 이렇게라도 고독사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세상이 찾아왔다는 생각에 한탄스럽기도 했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죽음이 존재한다. 다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딸려오는 슬픔과 아픔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란다. 그것이 망자가 바란 것일 테니까.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미친 듯이 아파하기를 바란다. 그러기를 바라고 죽음을 선택한 망자도 있을 테니까.



우리의 죽음은 어떤 양상일까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20년 8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올리는 이유는 귀찮음이 의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이미지는 직접 구매하여 라이선스를 부여받은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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