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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혜리 Mar 25. 2024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



며칠 전, 폐렴증세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가 퇴원을 한 엄마가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고 동생은 전화를 하였다.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낚싯줄을 드리우듯 말부터 던지는 동생에게 내가 차근차근 일의 전말을 묻자 전후맥락에 대한 설명도 없이 누가 옆에서  간병을 안 하면 간병비가 든다는 말부터 꺼내었다.


나는 어깨도 아픈 데다  기저귀를 찬 엄마몸을 한 팔로 지탱하기 힘들다고 말하였는데 동생은 그럼 간병인을 부른다며  대꾸를 하였다.


벌써 이십 년이 넘은 지난날, 나는 결혼을 하여 다섯 살짜리 아이 하나를 키우며 서울에서 내려온

남동생을 일 년 데리고 있다가 내보내고 공무원이 되기 위하여 준비 중인  여동생의 삼시세끼 식사를 챙기며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척추협착증이 있어 다리를 저는  엄마를 위하여 나는 유명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하게 되었는데 찾아간 척추전문병원에서는 골다공증이 있어 엄마의 수술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고 가만히 앉아서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다시 여러 대학병원을 돌며 겨우 명의를 찾아 허리 수술을 해 드렸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치었고 월세를 면하여 전세를 살고 있던 나는 비상시에 쓸려고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주머니를 풀어 소 한 마리를 팔고도 모자라는 엄마 병원비에 보태었고 그 이후에도 몸보신을 위하여 이름다른 지역의 한의원을 찾아  한약과 곰탕을 끊지 않고 일 년 가까이 드시게 하였다.


그 덕분인지 엄마의 몸과 혈색은  눈에 띄게 호전이 되었다.


그러나 밭일을 절대 하지 말라는 나의 부탁을 외면한 덕분으로 엄마는 다시 허리병이 도지셨다.


허리 영향인지 그 이후로 엄마는 살짝 뇌경색이 와서 또 몇 달간 병원생활을 하였고 코피가 터져 지혈이 안되어 병원을 다니는 등 병원출입이 잦았다.


그러는 사 나는 둘째를 가져 기저귀를 넣은 가방을 챙겨 태어난 아이를 안고 엄마 병 수발을 하였는데  몇 년 후 엄마는 다시 충치로 인하여 잇몸이 붓고 음식물 섭취를 어려워하여 다시 치과병원을 다니게 되었다.


치과에서 충치치료를 하고 위아래 틀니를 모두 하였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몇 년 후에  새로 다시 하게 되었고 허리 또한 재수술을 하시게 되었다.


엄마가 두 번째 허리 수술을 다시 할 무렵은 내가  병을 진단받은 다음 해였는데 대학병원처럼 큰 척추전문 병원이 아닌 집 가까운 허리전문 병원에서 동생은 엄마 시술을 시켜드렸고  그 후로  엄마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 이후로도 허리와 틀니로 인하여 약을 처방받고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는 등 엄마는 병원생활을 반복하였는데 이번에는 틀니를 오랫동안 끼지 않아

음식물이 위를 통하지 않고 기도로 바로 내려가 폐에 염증이 생긴 것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내가 하던 일인데 엄마가 병원에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남동생은 짜증 나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며 언성을 높였고 그럴수록 우리 사이는 더 나빠졌다.


내가 큰돈을  들여 처음 수술을 시켜드린 건 엄마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위함이었는데 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나는 많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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