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해 몇 명이 본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 후, 가해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자기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역할을 나누어 교육청으로 각종 민원을 넣었고 학교에 전단지를 뿌려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나는 부장교사였으므로 이런저런 민원에 대해 해명을 하고 경위서를 작성하는 일이 많아졌다. 말도 안 되는 억측과 문제랄 것도 없는 사소한 트집에 대해 대응을 해야 했다. 이런 것들을 반복하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내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경위서를 쓰면서 쾌감을 느꼈다.
어떤 사안에 대한 민원이 접수되면 교육청은 경위서를 요구한다. 경위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경위를 적고 약간의 반성(?)을 첨가해서 적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깊이 들어갔다. 경위서 자체가 이미 공문서이므로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내 감정에 빠져 절절한 소설을 썼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지금 가해자로부터 받은 피해가 무엇이고 학교는 얼마나 무책임한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내 사연을 적었다. 그러나 곧 이렇게 적으면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육청에서 원하는 건 감정이 아니라 팩트였다.
잘 쓴 경위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분량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다. 내 경위서를 읽는 사람은 업무에 찌든 공무원이다. 이들은 내 경위서를 취미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감정을 읽을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경위서에 적고 싶은 내용이 산더미 같더라도 이것들을 잘 선별해야 한다. 즉 임팩트 있는 소재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다. 분량은 가능한 적은 것이 좋다. 길면 누구나 지루해한다.
둘째, 모든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공무원이 내 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면 이들은 업무 모드로 내 글을 분석하며 읽어 내려갈 것이다. 분석을 한다는 것은 근거를 찾아낸다는 의미다. 이들은 근거가 있어야 움직인다. 근거도 없이 움직이는 공무원은 없다. 내가 주장하는 것들의 근거가 단순히 내 느낌이거나 소문이라면 아무리 절절한 소재라도 가치가 없다.
근거는 서류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내부결재문서, 메신저 내역, 녹취록, 통화 녹음 등이 가능하다. 이런 것들이 추가되면 공무원은 그제야 내가 푸념이나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자기감정에만 빠져 길길이 날뛰는 민원인은 공무원 주변에 너무도 많다.
셋째, 나는 최종 결재권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경위서를 쓰게 되는 위치는 중간관리자나 말단직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럽고 치사하지만 밥줄이 달린 일이니 꾹 참고 대충 써버리기 쉽다. 그러나 경위서를 제출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든 아니든 본인의 과실을 운운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귀찮다는 이유로 '대략 내가 잘못한 걸로 치자' 쯤으로 자신과 타협하더라도 이것은 또다시 상대에게 근거로 활용될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문서는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경위서를 적을 때 '내가 혼자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사에게 허락을 받고 움직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못돼먹은 인성을 지닌 상사를 만나 혼자만 억울하게 경위서를 쓰게 된 경우는 더욱더 이런 주장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그동안 많은 문서로 내 주장을 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다. 혹시나 근거가 있냐고 묻는다면 현재도 진행 중인 내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는 교육청으로부터 한 번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했음에도 말이다. 지금도 나와 적대적인 사람들은 내가 왜 징계에서 빠졌는지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경위서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경위서를 쓰면서 예상치 못한 수확도 있었다. 이것을 통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분노가 차오르는 날이면 글을 썼다. 내 감정을 글로 정확히 표현하고 싶기 때문에 고통보다 글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 경험상 화가 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오히려 잘 써진다. 희한한 일인데, 글은 내 치유의 수단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