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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na May 11. 2024

퇴사 일주일 후

코이카 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 파견직을 정리하며..

14년 전 인도네시아 봉사단원으로 파견되었을 때 단원을 관리하는 관리요원이라는 게 있는 줄 알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내가 저 일을 할 것이다 마음먹기를 수십 번,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 업무를 시작했고 정리 후 한국에 왔다.


꿈도 안 꾸었던 태국이 되면서 좌충우돌 태국생활이 시작됐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됐다. 물론 태국은 관광국으로 대부분 어느 곳을 가든 간단한 영어로 소통 가능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돈이 있다면 돈이 곧 언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사소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인도네시아어를 더 공부하게 만들었다.


정년이 보장된 연구원에서 2년 파견직 (이후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의 선택이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남편과 나는 익숙했던 일상과 과감히 결별하기로 했다. 말 안 통하는 외국에서의 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큰 모험이면서 추억이 되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은 이번 파견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우리는 손짓 발짓으로 버둥거리며 함께 문제를 해결했고, 아이의 성장에 함께 했다. 믿을 것도 가족밖에 없었지만, 내 말을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 역시 남편과 나 둘 뿐이었다.


비정규직이어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기한에 정함이 있는 노동의 홀가분함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책임감으로 부를 테지만, 당초 비정규직에게 책임감까지 요구하는 것은 말단 직원에게 사장의 마인드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있는 게 사람밖에 없는 나라여서 사람의 중요성을 모르는 한국에서나 가능한 논리다. 공공기관이라고 하나 이곳 역시 한국 시스템으로 돌아가기에 기괴한 논리로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나누는 이상한 셈법 역시 참 조선스럽다고 느꼈던 부분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한바탕 꾼 꿈이 되었다. 빛의 속도만큼 빠른 한국 인터넷에 놀라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변하는 다이내믹 코리아에 적응 중이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부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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