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피스모모 진행자 상반기 공부모임 ③
엄마는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가 되라고 늘 말했다. 신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지켜보는 존재로 상정되어 나는 매 순간 자기 검열을 하곤 했다. 지금 나는 착하게 행동했나? 정의롭게 행동했나? 옳은 일을 했나?
내 신의 도덕적 잣대는 세상의 그것과 너무 달랐다. 나는 종교 때문에 순대는 안 먹어. 기 경례도 하지 않아. 생일 파티도 안가. 반장투표도 하지 않아. 수혈도 받지 않을 거야. 축구 응원도 안 하고 나랑 친한 오빠들은 군대도 안 가. 이 모든 일은 사회적 고립과 고통을 수반했다. 나는 그때마다 내 안에서 소리 없는 분열과 불일치를 겪었다. 나도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과 ‘옳은 일’을 행하고 싶다는 마음속에서.
아렌트는 사유하기의 핵심이 “나와 나 자신 간의 소리 없는 대화” 혹은 “하나 속의 둘”이라고 보았다.(LM:286) 이는 소크라테스가 “나는 다른 사람과의 불일치보다 나 자신과의 불일치가 더 불편하다”(LM:281)라고 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검토하고, 그 결과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묻고 따지고 검토하는 일을 통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며, 그것에 대한 내 안의 합의를 추구하는 삶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드러내어 준다. 186p
그 지점에서 나는 거창하게 말하면 아렌트의 ‘사유하기’를 시작했다. 실제에 가깝게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류의 나 자신과의 불일치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나의 아이덴티티를 위협했다. 나는 나를 조각조각 뜯어내어 살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렌트는 “하나 속의 둘”이라고 표현했지만 내 안에는 그 이상의 내가 있었다. 평범한 것은 무엇인가? ‘옳은 일’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누구인가? 종교인 김진선과 자연인 김진선은 구분될 수 있는가?
무엇이 되었든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끝이 없는 고민이었다. 한 번도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시작하여 “일상적인 활동을 중지”하고(186p) 생각에 잠겼다가, 특정 시점이 되면 주변인에게 대화를 청했다. 특히 아빠는 각각의 개념어를 내 일상적 의미체계로 풀어내어 상대를 이해시키는 해빙시키기를 마치 게임처럼 즐길 수 있도록 긴 시간 나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걸로도, 종교에 대한 걸로도, 뉴스를 보다가도 싸웠다. 한번 말싸움이 붙으면 서로의 언어 사용에서 어떤 어긋남이 발생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종이를 가져다 놓고 단어를 가져다 적으며 끊임없이 검토했다. 같은 개념어를 어떻게 다르게 쓰고 있는지 서로 주고받은 그 대화들은 차곡차곡 쌓여 나를 공적세계로 부드럽게 안내했다.
공적영역의 공공성은 한편으로 함께 논의하고 생각하는 ‘공동의 세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공동의 세계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타인들 앞에 표현함으로써 ‘타인들 앞에 보이고 들려지는 공개성’에 의하여 획득된다는 것이다. 205p
아렌트의 공적영역의 공공성을 아빠와 함께 학습한 셈이다. 아빠와 함께 논의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또 이 세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말이다. 나는 이것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계’를 통한 ‘가르침’의 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로 이루어진 아빠의 세계를 전부 궁금해하지는 않았지만, 언어를 사랑하는 아빠의 세계를 사랑했다. 아빠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친구만 남고 아빠는 사라졌다.’고 투덜댔지만,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권력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아빠는 나를 공동의 세계로 이끄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아렌트는 ‘사유하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기가오리를 빌어 말한다. “스스로 마비됨으로써만 다른 것들을 마비시킨다.”(LM:266)고. 아빠는 내가 종교를 떠난다고 결심했을 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사유’하며 나를 비난하거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서로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로 했다. 그건 아마 우리가 오랫동안 ‘사유’하며 각자 자신의 내적 기준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악에 덜 취약하다고 논증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무사유는 이와 같이 내 안의 둘의 분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철저히 고립된 사람이 지니는 특징이다. 아이히만의 무사유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철저히 고립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을 함께 검토하고 제동을 걸고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내적 친구가 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악에 더욱 취약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사람은 내적 합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한 내적 기준을 갖기 때문이다.187p
종교생활을 떠나는 내게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특히, 종교적 준거에 맞춰서 살아오던 이들이 갑자기 아무 가이드라인 없이 세상에 노출되었을 때 겪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방탕하게 살게 되거나, 종교에서 벗어나도 어차피 너는 소심하게 그대로 살게 될 거라고.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만들어낸 ‘견고한 내적 기준’ 덕분에 지금도 흔들리면서도 천천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걸어가고 있다. 오히려 ‘신의 뜻’을 지킨다며 ‘무사유’에 빠져있는 주변인을 볼 때면 약간의 공포를 느끼곤 한다.
교육공간에서의 ‘사유하기’가 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그래서다. 내가 ‘사유’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대안학교에 있던 시절과 교육실습을 나갔던 때에 아렌트를 알고 ‘사유하기’라는 개념을 명징하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현재 교사를 하고 있는 내 주변 친구들이 이 개념을 안다면 어떨까? 이 ‘사유하기’를 ‘전기가오리’처럼 함께 주변을 마비시키고 전염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고민하며 글을 마친다.
● 공부자료: 박은주(2021)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169~254p
● Q. 한나 아렌트의 '사유' 개념을 선생님이 이해한 대로 알려주세요. 일상에서, 교육 공간에서, ‘사유하기’는 어떻게 가능해지나요? 경험을 중심으로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