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기준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왜 그런 사람이랑 친구를 해요?"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에 간다는 친구가 있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는 내 이야기에 다른 친구가 무심코 한 질문이었다. 그 당시엔 흘러가버린 질문이었지만, 집에 돌아온 뒤에도 잔잔히 오래도록 생각거리가 남았다. 왜 친구를 계속하는가의 질문은 왜 친구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까지를 친구라고 인식하는가, 친구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친구를 정의 내리는 것부터 어렵다. 사람마다 친구에 대해서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수의 사람만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부터, 서로 얼굴 두세 번 본 사이여도 편안하면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몇 번 이상 만나야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아주 어색한 사이만 아니면 대개 나는 친구라고 명명하는 편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친구 관계라고 이름 붙였을 때 우리가 자유롭지는 않다. 유유상종, 근묵자흑이라는 말처럼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친구를 두고 있을 때 그 평가는 내게도 영향을 미친다. 나 역시 비슷한 사람이리라고 판단당하거나, 혹은 곧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당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로 인한 책임에 내 몫이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하지만 정치/종교처럼 첨예한 대립이 있을 수 있는 부분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일이기도 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 내가 생각했을 때 틀린 부분을 동조하지는 않되, 상대방이 불편감을 느끼지는 않을 수준에서 나의 의견을 밝히거나 적어도 그 화제를 중단하게 만드는 화술이 요구되는 지점인 것이다. 물론 친구 중에서도 아주 라포가 잘 형성된 친구 거나 가족쯤 되면 그런 점잔 빼는 기술이고 뭐고 없이 왜 상대방이 틀렸는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십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정도 논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라포가 형성되어있지 않은 사람을 친구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의문도 피어올랐다. 서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찐친'이라는 이유로 얼버무리는 것은 지양해야 할 문화지만, 사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아주 다른 순간에 서로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으려면 그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서로 일정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예의를 갖춰야 하는 지인이 아니라 친구라고 여기는 관계라면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신념이 다를 때 오히려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앞서서 이야기가 나왔던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간다고 하는 친구에 대해서는, 그 순간 내 안에서 불편한 감정이 먼저 올라왔기 때문에 나는 그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끌고 가지는 않았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게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은 뒤라고 해도 아마 그 주제로 대화를 해보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몇 차례 다른 대화로 쌓여온 맥락 속에서 내 의견을 귀담아듣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얘는 친구 아님'의 선에서 일종의 '손절'을 쉽게 해 버리는 문화에 대해서는 또 부정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서 살아야 사람이 극단적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그것을 못하게 인터넷의 알고리즘이 막고 있어서 정치적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고. 나도 내가 옳다는 생각에 갇혀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게 되거나 편견에 잡히지 않아야겠다는 반성을 매번 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달라도 괜찮아'에서 '괜찮은' 것을 넘어서서 친구로, 가족으로, 연인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다. 얼마 전 택시를 탔을 때 아저씨가 내 사무실 이름을 흘긋 보더니 이렇게 말문을 텄다. "자선단체 같은 이름이네요. 좌파가 돈 쓰려고 만든 건가 보죠?" 그래서 사무실까지 가는 한 시간 내내 나는 '좌파의 선봉장'쯤 되어 그분의 '평화교육이 도대체 왜 필요하냐', '좌파는 왜 애를 안 낳냐'와 같은 질문세례에 응답해야 했다. 내 대답은 "지금 아저씨와 제가 정치적 성향이 다르지만 젠틀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와 공존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평화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손절하기란 너무 쉽다.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을 피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삶이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엉킨 것을 시원시원하게 칼로 잘라내며 살아갈 수 있는 사이다감성으로 살아만 가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어딘지 엉거주춤한 것 같은 채로, 무언가 답답함이 가득한 상태로, 나를 고통받게 하는 저들하고도 어떻게 공존해 나갈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형태인지도 모른다.
친구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상태로 저들을 내버려 두며, 다만 사랑하며 내일도 살아낼 것이다. 나는 종교는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게 내가 아는 예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고, 언젠가 그들에게 설득할 수 있도록. 그 설득이 열에 한 번은 좀 먹힐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