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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비 May 14. 2020

그대의 따뜻한 손

<그대의 차가운 손> - 한강 

  한강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작가가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책이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아서. 한강 작가는 현장을 기록하듯,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도록 묘사하며 책을 썼다. 그래서 책을 덮은 후에는 잔잔하면서도 속에서 여러 것들이 요동치는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누군가의 삶을 간접 체험한 듯한 느낌에 그 여운이 길게 남았다.


  이 책은 숨겨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한강 작가는 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늘어짐 없이 섬세하고 세심하게 전달한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삶의 방향이나 교훈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 곳엔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했다. 이 책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이 책은 크게 액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라진 장운형의 기록이 그 액자 내부의 이야기이다. 장운형은 두 손가락이 없던 외삼촌에 대한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시작해 사라지기 전까지 만나온 사람들, 그리고 E의 육손이 이야기로 끝을 내면서 숨겨진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숨기고 있는 진실들이 있다. 운형의 어머니는 가식적인 미소 뒤에 두려움을 숨겼고, 외삼촌은 사라진 자신의 엄지, 검지 손가락을 숨겼고, L은 자신의 몸의 과거를 숨겼고, E는 완벽한 미소 뒤에 11번째 손가락을 숨겼고, 운형은 자신의 이야기를 숨겼다. 각각의 인물들이 숨기는 것은 다르지만 그 안에 하나로 통하는 것을 알아차려야한다. 장운형의 기록은 ‘그녀의 차가운 손’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그대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작가가 그대라고 부르는 대상은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살아간다. 대부분은 (책 속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웃음으로 진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웃음은 밝고 숨겨진 것들은 어둡기 때문이다. ‘숨긴다’라는 말 자체가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 진실은 밝히고 싶지 않은 어두운 것들일 것이다. 


  우리가 숨기는 것들은 가끔은 자신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숨겨진 것들도 있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 너 진짜 모습을 모르겠어. 


  그리곤 친구는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고 했다. 말투나, 표정이나, 하는 얘기나, 행동이나. 나는 정말 그랬다.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마치 그 사람에 맞추듯이 내 모습을 바꿔갔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내 진짜 모습은 무엇이지.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내 진짜 모습을 숨기고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이러다가 내 진짜 모습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다가왔다. 한편으로 자신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고 싶어 진실들은 숨기다 못해 새 것을 바뀌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과거의 육손이 시절을 숨기고 완벽한 새 사람으로 태어난 E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숨기려 해도 우리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완벽히 숨겨졌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쉽게 숨기려하는 것은 감정들이다. 물리적인 것을 숨기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숨기고자 하는 건 감정이다. L은 자신의 뚱뚱한 몸에 가려진 떨어진 자존감을, E는 육손이 시절의 두려움을, 외삼촌은 사라진 두 손가락에 따른 분노를, 그리고 운형은 사랑을 숨겼다.


  가면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려진다. 우리는 점점 더 각자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익명, 표면적 인간관계, 가식... 각자가 탈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추다 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까지 믿을 수 없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숨기길 계속하다보면 진짜를 잃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실을 배출할 공간이 필요하다. 운형에게 기록은 배출이었고, 이 기록에서 만큼은 숨김이 없었다. E에게 운형은 배출이었고, L에게 먹는 것은 배출이었다. 그리고 그 배출은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운형과 E가 서로의 배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숨김을 발견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소, 눈, 안경... 운형의 기록에는 다양한 숨김의 방식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눈’에서 만큼은 진실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표정을 만들고, 외모를 바꾸고, 말을 지어내도 우리의 일부 중에서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한강 작가는 눈에 대한 묘사를 자주 한다. 작가도 눈만큼은 진실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눈은 마치 내 피부를 꿰뚫고, 내장과 혈관들을 꿰뚫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웃고 있는데도 마치 눈물에 번쩍거리고 있는 것 같은 그 두 눈은, 방금 차가운 연못에서 건진 까만 돌멩이들 같았다. 
그녀의 눈 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운형과 E는 서로의 눈을 통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을 관찰하며 숨기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려는 욕구가 있었고, E 또한 눈을 통해 운형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감추는데 바빠 남의 아픔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타인과 눈을 마주치며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L 또한 자신의 아픔을 감추는데 운형의 진정한 배출구가 될 수 없었다. 


  책의 중후반까지는 자가 배출하기만 하는 껍데기를 벗겨내는 정도였다면, 마지막에 운형과 E의 모든 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로가 서로의 배출구가 되어줬을 때 드디어 껍질은 벗겨졌다. (책에서 껍데기와 껍질의 차이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감탄을 내뱉었다. 한강 작가가 얼마나 깊이 있게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대화를 한다. 

- 너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 마음이 따뜻해서 그래.

 우리 모두는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다. 이 따뜻함을 숨기기 위해, 따뜻한 것은 연약하기에, 진실은 가끔 아프기에, 상처받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차가운 손으로 감춰버린다. 이 책에는 엄지와 검지가 없는 손, 11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 통통하지만 아름다운 손, 차가운 손 등 다양한 손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 손은 모두 따뜻한 손임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손을 잡아줄 수 있어야한다. 우리는 진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 한강 작가가 ‘그대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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