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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Nov 21. 2020

기억 저편 너머에 있는 그리움

엄마 이야기 12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모님이 출근하면 나는 오빠 랑 함께 놀았다. 오빠는 자주 장난감 총을 갖고 싸움을 같이 하 자고 했고 자주 벌어졌던 상황은 이러했다. 

“자, 베개로 쌓아놓은 곳 여기에 숨어있다가 이 총으로 날 공 격하면 되는 거야. 대신 내가 널 총으로 쏘면 너는 죽어야 돼.” “죽어? 죽기 싫으면?” 오빠는 나쁜 악당은 원래 죽는 법이라고 알려줬다. 내가 악 당 하기 싫다고 하면 선심 쓰는 척 한두 번 정도는 착한 사람 역할을 나에게 주었다. 싸울 때는 착한 놈, 나쁜 놈이라 했다. 내가 착한 놈이 되자마자 오빠는 바로 내가 쏜 총 한 방에 죽 었고 바로 역할 체인지가 되었다. 


오빠는 부모님이 늦게 오시 는 날이면 혼자 볶음밥을 하거나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안 주겠다고 협박을 하며 약 올렸다. 아주 지겹도록 싸우고 오빠를 원수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 우리 남매의 싸움은 오빠가 대학생이 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오빠는 나에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고 늘 성실하고 진지하게 변했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는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나는 왜 오빠가 더 좋은 대학을 안 갔을까 궁금했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집안에 무슨 문 제가 있어서 돈이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집안의 공기가 무거웠고 가슴이 답답함을 자주 느꼈다. 나 역시 중요한 시기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빠의 모든 행동과 말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미움의 싹은 더욱 커졌다. 


지금은 매우 진중하고 차분한 오빠는 어린 시절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다.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책상 밑에 숨었는데 잠 이 들은 적이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잠이 깨서 안방에 가 보니 오빠는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그 장면은 본 나는 너무 약 올라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머리가 좋아서인지 약 올리는 것도 지능적이어서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 라갈 수도 없었다. 집에서 우리를 돌봐주던 도우미 언니가 있었다. 하루는 시장에 갔다가 호떡을 사 왔는데 우리 남매의 입과 손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놔서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호떡을 언니가 먹여 주었던 일이 있었다. 또, 방바닥에 로션을 듬뿍 쏟아 미끌미끌하게 만들어 스케이트를 타며 놀다가 부모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었다. 부엌에서 수저에 달고나를 해 먹다가 새카맣게 태운 수저를 들고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지붕 위로 던져버린 일도 있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과감 한 놀이들을 오빠와 놀면서 많이 경험했다. 

어린 시절 추억의 반을 차지하는  '달고나' 


그 시절 나는 많이도 울었지만, 함께이기에 우리는 즐거웠고 행복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추억이다. 오빠가 있기에 든든했고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의좋은 남매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빠가 너무 멀게 느껴지고 오빠란 존재가 있기에 더 외로워질 때가 많다. 이제 오빠와 나는 오십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차츰 아픈 곳도 생기고 자식도 키우며 돈 들어갈 곳도 많고 갖가지 고민과 힘든 일들이 많다. 부모님은 나이 들고 병들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그 옆에는 항상 내가 있다. 떨어져 있는 오빠는 모르는 일들이 시시때때로 벌어진다. 지치고 힘들지만 오빠에게 매번 시시콜콜 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분당에 사는 오빠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내려와 달라고 부 탁하면 내려오지만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부모님 얼굴 한번 보러 일부러 온 적은 없다. 군산에 볼 일이 있어서 내려왔다가 들린 적은 있다. 명절날이 오빠가 오는 날이 되었다. 참 아쉽고 서운한 점들이다. 부모님 마음은 어떨까? 든든한 장남, 어렸을 때부터 믿음을 주었던 착한 아들인데 아무리 부모라도 서운한 감정이 전혀 없을까? 


부모님이 증평에 살 때 엄마가 너무 걱정이 돼서 운전도 못 하는 나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4시간 거리의 친정을 자주 갔었다. 자꾸 오지 말라는 아빠가 못 미더워 전화도 안 하고 몰래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를 발견한 것이다.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실 소파에서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와락 쏟아지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아빠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빠도 엄마를 보살피느라 많이 지치고 늙어 있었다. 그런 상황들이 너무 싫었다. 두 분이 집안에만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해 보여 아빠와 함께 엄마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며 사람의 온기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두 분만 계속 살게 내버려 두면 곧 돌아가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결심했다. 부모님을 군산으로 모셔오기로.


가끔 주위에서 오빠는 얼마 만에 한 번씩 군산에 오냐고 묻는다. 바빠서 거의 못 온다고 하면 무슨 일이건 마음이 있으면 잠깐 짬을 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무심하다고 말한다. 결국 오빠가 욕을 얻어먹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오빠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묻는 것도 불편하다. 누구네 집은 형제들끼리 역할 분담을 해서 부모님의 일 처리를 해 주고 돌본다고 하던데 왜 나는 혼자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남편이 너무 일을 잘 처리하고 도와줘서 오빠가 너무 안심하고 그런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빠는 멀리 살고 회사 일도 바쁘니 이해했다. 가까운 자식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는 걸까? 정말 요즘 은 힘들고 외롭고 내가 기댈 곳이 필요하다. 남편에게도 미안하다. 내 체력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남편이 내 대신 혼자 다 해준다. 그럴 때면 오빠가 생각나고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전화라도 자주 해서 안부라도 물어주고 애써줘서 고맙다 는 말이라도 해주면 힘이 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의 힘은 대단하다. ‘사랑해’, ‘고마워’, ‘네 덕분이야’, ‘지금 잘하고 있어 ‘, ’ 넌 특별해’ 이런 말들이 주는 효과가 엄청난 것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경험했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격려의 말이나 힘이 되는 기분 좋은 말들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119 구급차에 처음으로 실려 가던 날, 처음 겪는 일에 당황했고 무서웠다. 중환자실에 엄마가 들어가던 날, 보호 자는 들어올 수 없다며 막았을 때 눈물이 났다. 호스피스 병동에 엄마가 입원하던 날, 생각해 보지도 않은 말들을 잔뜩 무섭게 적은 종이를 내밀며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할 때 와락 겁이 났다.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서명하면 된다고 말하는 오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오빠의 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너무 건조하게 들렸다. 시간이 흘러 내 몸이 지치고 자꾸 아프다 보니 오빠에게 서운한 감정이 쌓여만 갔다. 부모님을 곁에 모신 지 4년이 넘으니 나도 한계가 오는 것 같다. 자꾸 몸이 아프니 짜증만 늘어가고 부모님의 말도 여유 있게 들어줄 수가 없게 되었다. 엄마는 잘 지내다가 일 년에 몇 번은 갑자기 119 구급차에 실려 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초주검이 된다. 지 난 4년 반 동안 엄마가 응급실에 다녀오거나 병원에 입원했던 일이 열댓 번은 넘는 것 같다. 오빠는 더 멀어지고 나는 부모 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남편과 내가 결정한 일이니 책임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크다. 


나는 요즘 부모님이 건강하고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오빠랑 싸워도 그때가 좋았고 부모님 한테 혼나도 그때가 좋았다. 부모님도 젊고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찬란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우리 가족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건강하게만 살았으면 더 바랄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데 건강을 잃으니 돈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나마 아빠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엄마는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거의 없다. 그러니 엄마가 제일 안쓰럽다. 그래도 엄마를 그렇게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엄마가 더 나약해지고 용기를 잃을까 봐 그냥 더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찾아보고 그런 여건들을 마련해준다. 부모님 당신들은 더 간절하겠지만 요즘 부쩍 누워만 있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엄마의 힘없는 얼굴이 측은해서 애써 외면할 때도 많다. 힘없는 모습의 엄마를 보는 건 언제나 힘들다. 힘들지만 내 곁에 엄마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너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자식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다. 내 건강이 허락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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