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고히 Jul 13. 2023

가까이 선 사람

"그래서, 그때 거기서 뭐라 그랬었냐면.."

"어, 잠깐, 잠시만 미안해, 우리 여기 좀 잠깐 보고 가자" 


 함께 걷는길, 신나게 재잘대는 연인의 말을 느닷없이 끊어섰다. 그리고는 한켠으로 비켜서며 별 의미 없는 곳을 가리킨다. 처음엔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뭘 본다고 이러나'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곤 했던 그녀도 이제는 익숙한 듯, '아' 하며 함께 비켜서서 최선을 다해 그곳을 바라봐준다.  

 잠시 뒤면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난다. 


 풍경을 보는척 하거나, 길가에 핀 잡초를 보는 척 하며 잠깐의 시간을 더 보내고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장면. 바로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길 양보하기다.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다. 거기에 더해 그 상황이 유지되는것을 오래 견디질 못한다. 환상적인 조합이다. 그러니 언젠가부터 되도 않는 연기를 통해 뒷선이를 앞선이로 만들어주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사실, 그게 앞이든 뒤든 주변 일정한 거리에 생면부지의 타인이 머무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그래서 만일 누가 앞에 비슷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걷고있으면 몇 분 참지 못하고 추월을 해버리고, 또 어떤이가 좁은 길을 적당한 거리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으면 기어코 그들을 앞서보내서라도 온전한 공간 확보를 추구한다.  

 기억이 닿는 가장 오랜 과거로부터 관객없는 공연은 이어져 왔다. 무대는 등굣길 부터 퇴근길 까지 다양했고, 조연은 어머니인적도 여자친구인 적도 있었다. 설정도 때마다 달랐다. 초등시절엔 참새가 많았어서 그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어린이를 자주 연기했고, 조금씩 나이가 들고서 부터는 들꽃 같은 유한한 것 앞에 멈춰서서 또 하나의 시절이 저무는 것을 아쉬워 하는 듯한 연기를, 그마저도 없을 땐 그것이 하늘을 바라보며 경탄하는 듯한 표정연기를 선보였었다. 갑자기 멈춰서더니 한켠에서 흐린하늘을 멍하니 보고있는 허우대 멀쩡한 총각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시고는 지나가신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쩄거나 그 모든 즉석무대의 유일한 주연이자 연출이었던 그 모든 순간들을 꽤나 오랫동안 멋쩍게 여기면서도, 즐겼었다. 


 요즘은 혼자서는 무대에 서는일이 거의 없다. 출퇴근 길은 각기의 이유로 여유가 없어서 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일이 없고, 대부분 널찍한 도로를 바삐 걷기 때문이다. 결국 가끔 마주하는 양보 직전의 상황은 대부분 연인과 함께 한적히 어딘가를 걸을때다. 예전에 한 번 그녀에게 지나는 말로 나의 성향과 그간의 무대 이력에 대해 짧게 설명한 적이 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 날 이후로 오롯이 내 차지였던 무대의 주연이 둘로 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무대가, 연기가 아니게 되었다. 잠깐 비켜선 길에서, 더는 애써 하늘을 바라보는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가만히 비켜서 주는 이의 손을 소중히 쥐고는 정말 잠깐이라도 하늘을 함께 바라보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맑든 흐리든, 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