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5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윤리로 다시 살핀 상담사의 상담 사례 공개

내담자의 안녕을 저해하는 상담사의 ‘사례 팔이’, 이제 그만

by 카일 Feb 09. 2025

얼마 전 상담 분야에서 공신력 있다고 여겨지는 한 학회에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상담사의 상담 수기를 공모받겠다는 공지가 게재되었다. 설마, 내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첨부서류를 샅샅이 살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내담자 동의서가 쏙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분노가 치밀던지… (하루쯤 지나 동의서가 추가되긴 했다) 전문가 집단을 자처하는 학회마저 이 지경인 형국에, 브런치를 비롯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횡행하는 상담사의 속칭 ‘사례 팔이’가 왜 문제적인지 지적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뜻하지 않게 강력한 계기를 마주한 만큼 지금이라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학계에서 먼저 불거진 사생활 침해 논란


내가 한 말, 내가 겪은 일, 그것도 굉장히 내밀한 이야기가 타인의 소설에 쓰였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 사실에 대해 독자는 작가에게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반영할 수 있나.
임지영. (2024. 7. 24.). 정지돈 사태가 남긴 질문. 시사IN.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38 


몇 년 전부터 문학계에서는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 당사자의 안녕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일이 줄곧 불거져 왔다. 어떤 창작물이든 창작자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창작물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문제로 비화한 것은 어디까지나 창작자에게 무한 책임을 지워야 할 일이라 본다.


일련의 사건에 연루된 작가의 앞날은 꽤나 불투명해졌고, 사생활을 침해받은 당사자가 입은 피해는 아직까지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다. 명문화된 직업윤리도 없고, 각색을 거쳤다고 주장할 여지도 있는 창작물이 갖는 파급력이 이 정도다. 상담사가 내담자의 실제 사례를 섣불리 공개한 결과물이 내담자의 삶에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은, 장르 특성상 허구로 취급받는 소설보다 더할 것이다.




내담자의 비밀 보호와 상담사의 출판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윤리규정 — 5. 정보의 보호 및 관리 — 가. 사생활과 비밀 보호 중 발췌

상담심리사는 상담 과정에서 알게 된 내담자의 민감 정보를 다룰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하고, 상담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관리에 있어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된 법을 준수해야 한다.

상담심리사는 사생활과 비밀 유지에 대한 내담자의 권리를 최대한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상담심리사는 강의, 저술, 동료 자문, 대중매체 인터뷰, 사적 대화 등의 상황에서 내담자의 신원 확인이 가능한 정보나 비밀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속칭 비밀 보장의 원칙으로, 상담사가 “상담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비밀에 부쳐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에 해당한다. 이는 안전한 상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켜야 할 제1원칙이며, 이를 모르는 채로 공신력 있는 자격을 취득하는 상담사는 감히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물론 공신력 있는 자격 없이도 얼마든지 상담을 할 수 있는 한국의 실정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겠지만, 자신이 상담한 사례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상담사를 맞닥뜨릴 때마다 기본 중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행태에 늘 놀라게 되는 이유다. (그런 상담사, 브런치에 키워드 검색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쯤에서 상담 내용을 충분히 각색했으니, 내담자의 신원을 적시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상담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창작과 각색의 전문가라는 등단 작가조차 사생활 침해 논란에 줄줄이 연루된 것으로 볼 때 그 ‘과한 자신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부터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윤리규정 — 5. 정보의 보호 및 관리 — 마. 상담 외 목적을 위한 내담자 정보의 사용 중 발췌

교육이나 연구 또는 출판을 목적으로 상담관계로부터 얻어진 자료를 사용할 때에는 내담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며, 각 개인의 익명성이 보장되도록 자료 변형 및 신상 정보의 삭제와 같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내담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한다.


넓게 보면, 상담사가 상담 사례를 활용한 글 등을 창작하는 것 또한 출판에 속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앞에 줄줄이 달려 있는 ‘교육이나 연구’라는 조어로 미루어 볼 때, 이 규정은 공익적 목적을 위한 정보 공개에 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상담 사례를 공개하기 전 그 행위가 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인지, 상담사의 사익을 추구하기 것인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또한 이 규정에는 상담관계로부터 얻어진 자료를 사용할 때 내담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설사 내담자에게 동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담자에게 피해를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즉 사전 동의를 구했더라도 상담 사례 공개로 인해 사생활 침해가 발생할 경우, 윤리를 위반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내담자 복지와 사익 추구의 제한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윤리규정 — 3. 내담자의 복지와 권리에 대한 존중 — 가. 내담자 복지 중 발췌

상담심리사의 일차적 책임은 내담자의 복지를 증진하고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상담심리사는 내담자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움을 주며, 어떤 방식으로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상담심리사는 상담관계에서 오는 친밀성과 책임감을 인식해야 한다. 상담심리사의 개인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 내담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되며, 내담자로 하여금 의존적인 상담관계를 형성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담사의 개인적 욕구 충족을 위해 내담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은, 상담사의 사익보다 내담자의 복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했듯 상담사가 상담 사례를 공개하는 것이 공익 증진과 충분히 맞닿아 있다면, 이에 한해 최소한으로 상담과 관련된 자료를 충분한 각색과 익명화를 거쳐 활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담 사례 공개는 1) 상담사 자신을 홍보하고자, 2) 상담사 스스로 자신이 지닌 전문성을 인정받고자, 3) 상담사가 상담 과정 또는 전후로 느낀 감정을 공감받고자 하는 등, 상담사의 사익에 의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윤리 위반의 소지가 다분하다.




예시로 살펴보는 ‘사례 팔이’의 위험성


※ 인용구에 담긴 글은, 그간 여기저기서 숱하게 봐 왔던 ‘사례 팔이’를 재조합해 각색한 순수 창작물이다.



좋았다는데 문제가 되나?

얼마 전 상담했던 내담자가 마지막 상담 도중 나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선생님과 상담할 수 있어 기뻤어요. 저를 다시 찾는 느낌이었달까요. 지금껏 만나지 못하게 해준 관계를 갖게 해준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수줍게 전한 마지막 인사와 함께 건넨 편지를 받아드니, 나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마음이 들었다. 상담사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후략)


윤리 위반이다. 내용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비밀에 부쳐야 할 상담 내용을 내담자의 동의 없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비밀 보장의 원칙조차 지키지 않음으로써 상담사가 갖는 전문성과 신뢰성을 스스로 깎아내린 셈이다.


5회기 즈음, 나를 힘들게 했던 내담자가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상담을 받으며 마음이 더 복잡해진 것 같아요.” 상담사로서 그 말이 참 반갑게 들렸다. 여간해선 감정을 내어놓지 않던 내담자가 비로소 솔직하게,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내어놓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후략)


내담자에 대한 긍정적(?) 평가 내지 판단이 난무하는 상담사의 글을 뜻하지 않게 당사자가 읽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그 사람의 취약한 순간을 곱게 닦아 훈장처럼 전시해두는 상담사에게 상담받는 것을 안전하다고 느낄 내담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신상 정보를 다 지웠으니 된 거 아닌가?

내담자 A는 30대에 싱글맘이 된 여성으로, 이혼을 하고도 자주 집에 들이닥치는 전 남편으로 인해 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상담 과정에서 A는 전 남편에 대한 증오와 애정이 자기 마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더욱이 A와 전 남편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의 거리가 멀지 않고, 아이 또한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둘의 생활 반경이 필연적으로 겹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A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후략)


신상 정보를 적시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늘 간과되는 지점이 바로 상담사의 특정성이다. 프로필에 담긴 이력이나 근무지 등으로 상담사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다면, 당사자 또는 당사자 주변 사람들이 상담사의 신상을 바탕으로 내담자를 특정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전문상담교사 단톡방]
김아무개(숲골초):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희 학교에 자꾸만 문제를 일으켜 Wee클래스로 보내지는 학생이 있어요. 이 학부모가 맞벌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협조가 안 되는데, 오늘 학생과 이야기를 해보니 팔에 멍이 들어 있더라고요. 아동학대 관련해서 탐색을 해보긴 했는데, 아이가 대답을 잘 안 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ㅠㅠ...


내담자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담겨 있지 않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해서 말한 것이겠지만, 김아무개(숲골초)로 상담사의 이름과 근무지가 적시된 것이 문제가 된다. 교사 중에는 교사이면서 동시에 학부모인 경우가 상당수고, 단톡방에 속한 교사 중에는 숲골초 학부모인 교사가 있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문제가 되는 아이에 대한 소문은 늘 돌기 마련이기에, 단톡방에 속한 누군가가 상담사 정보를 통해 내담자를 특정하게 될 경우 비밀 보장을 위반한 것이 된다.


[대학교 상담센터 상담사 브이로그 자막]
오늘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내담자가 있었다. 윤리 때문에 사정을 상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달 동안 다른 상담사들을 돌아가며 괴롭혔던 내담자라 그러려니 하는 중 ㅠㅠ (중략) 우리 상담센터에 새로운 상담 선생님이 들어왔다! 알고 보니 석사 후배라네? 더 반가웠다. (중략) 오늘따라 문무관 햇살이 밝길래 한 컷!


브이로그 촬영 당일 새로운 상담 선생님이 들어온, ‘문무관’이 있는 대학교 상담센터의 상담사. 영상 속 얼굴을 아무리 꼼꼼하게 가렸더라도, 근무지를 공개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더라도, 흘러나온 정보만으로 브이로그를 찍은 상담사가 누구인지 특정할 여지가 있다.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따지면 상담사로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싶겠지만… 답은 간단하다. 내담자와 관련된 것들 일체를 어디에서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된다.




‘사례 팔이’를 하지 않으려면


어디서든 내담자와 관련된 것들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담자에 대한 감상이든 뭐든 내담자와 연결될 수 있을 법한 것들 일체를 공개된 장소에서 입 밖, 또는 손가락 밖으로 내어놓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다. 굳이 내담자와 관련된 것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상담사의 경험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가상의 상담 사례를 다뤄야 한다면, 창작물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기. ‘글에 담긴 상담 내용은 다양한 사례를 각색 및 재조합해 창작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님을 밝혀둡니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로 섣불리 오해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다. 더불어 창작과 각색의 전문가인 작가마저 일련의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을 명심하고, 핍진성을 최소한으로만 지니도록 사례를 제시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되겠다.


실제 상담 사례를 다뤄야 한다면, 1) 그 목적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2) 내담자에게 공개할 내용에 대해 설명한 후 동의를 구하고, 3) 내담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상담 내용을 공개하기. 서두에 언급했던 상담 사례 공모전은, 상담의 효과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공익적 성격이 강하므로 내담자의 동의를 구한 후 상담 내용 일부를 공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내밀한 내용을 공개해 내담자에게 사생활 침해로 인한 피해를 야기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담심리학과 인접 분과・분야 비교하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