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1, 2일 차
회사 워크샵으로 1박 2일, 그 뒤에 개인적으로 2박 3일을 더 놀아서 총 3박 4일로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제주라기엔 애월에만 있어서 애월 여행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코로나19가 퍼진 이후 짧게 노는 것 외에 길게 쉬다 온 게 처음이다. 집을 떠나 세 밤이나 자고 온다는 건 내 기억보다 설레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출발하는 날 오후 늦게까지 재판이 있어서 회사 사람들이랑 따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다. 금요일이라 재판 끝나고 집에 들렀다가 캐리어를 가지고 공항에 가면 차가 너무 막힐 것 같아서 그냥 재판에도 캐리어를 끌고 갔다가 법원에서 바로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오후에 가정법원에 재판이 있었는데 캐리어를 끌고 가정법원을 목적지로 카카오 택시를 불렀더니 택시기사님이 "가정법원 가는 거죠?"라고 물어보면서 흘끗 뒷좌석의 캐리어를 보았다. 별생각 없이 맞다고 대답하고 앉아있는데 기사님이 한숨을 푹 쉬고 굉장히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면서 자꾸 혀를 찼다. 그제야 캐리어를 끌고 가정법원에 가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근데 또 그렇다고 물어보지도 않는데 먼저 '기사님, 제가 집 나와서 이혼하러 가는 건 아니구요. 이혼 전문 변호사구요, 오늘은 제주도 여행 가는 거예요.'라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최대한 흥겨워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역효과였는지 기사님은 라디오에서 양소영 변호사님이 이혼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인 '양소영 변호사의 상담소'를 틀어줬다. 이래저래 이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금요일이라 제주도 가는 사람이 많은지 비행기가 자꾸 딜레이 되었다. 7시 비행기라 그래도 9시경에는 호텔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막상 호텔에 가니 10시 반이었다. 어차피 가면 술 먹을 거라 저녁 먹기도 애매해서 그냥 저녁도 안 먹고 기다렸는데 나중에는 진짜 배고파서 어질어질했다. 제주도는 정말이지 제시간에 도착해본 적이 없다. 사실상 활주로가 한 개뿐인 제주공항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그래서 제주지법에 재판이 있어서 갈 때는 늘 두 시간 이상 여유를 두고 비행기를 예약했었다.
호텔에 도착했더니 이미 회사 사람들은 만취상태였다. 한라산 소주도 이미 다 먹어버린 뒤라서 캔맥주랑 보드카 남은 것만 열심히 먹었다. 한라산 토닉을 만들어 먹은 것인지 토닉워터도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제주도 가기 전에 고등어회 먹고 싶다고 회사에서 계속 노래를 불렀던 덕분인지 다른 변호사님들이 배달음식으로 고등어회를 야무지게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딱새우랑 흑돼지도 있었다. 관광지라 그런지 배달기사들한테 현금으로 배달팁 만원씩을 더 챙겨줘야 했는데 좀 많이 어이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미리 챙겨간 숙취해소제 한 박스를 뜯어 주변에 좀 나눠줬다. 새벽 두 시경까지 떠들면서 술을 더 먹었다. 좀 빨리 취해서 흥의 농도를 맞춰야 하는데 술이 없으니 영 더뎠다. 그래도 다들 너무 신나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좀 즐거웠다.
새벽에 잠을 자러 가야 하는데 먼저 자러 간 사람들이 방 카드키를 다 가져가 버리고는 그냥 잠들어버린 채로 문을 안 열어줘서 여자 변호사 셋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허허. 다행히 나는 엄청난 촉으로(?) 저 사람들이 문을 안 열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캐리어를 방에다 안 갖다 놨었는데 신의 한 수였다. 내가 챙겨 온 클렌징오일 샘플을 다 뜯어서 셋이 열심히 씻고 그냥 풀빌라에 있는 방에서 잤다. 다들 씻는 동안 나는 밖에서 혼자 수영을 했고 제일 마지막에 씻었다. 추워서 좀 들어가고 싶었지만 화장실이 하나라 별 수 없이 계속 수영을 했다.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수영을 좀 더 했다. 아침 바닷바람을 쐬며 혼자 수영을 했더니 기분이 좋았다.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너무 여유롭다 보니 그 수영장에 물을 받고 빼고 청소하고 하는 과정까지 상상할 수 있었고, 곧 집에 수영장이 있으면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을 청소해줄 사람까지 있어야 진정한 수영장의 완성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망상조차 맘대로 할 수 없다니! 좀 슬펐다.
아침 겸 점심으로 갈치구이 파는 집에 가기로 해서 조식 뷔페는 대충 한 접시만 먹었다. 훈제연어랑 스크램블 에그가 진짜 맛있어서 10접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갈치를 맛있게 먹기 위해 참았다. 안타깝게도 갈치구이집은 맛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다.
'갈치관'이라는 갈치구이집에 갔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모든 음식이 평범했다. 그렇게 맛이 있지도 없지도 않았다. 관광지에서 뷰로 장사하는 음식점은 대개 그렇다. 가격이 싼 편도 아니었는데 전복솥밥에 전복이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일 정도로 적게 들어 있어서 좀 화가 났다. 내가 육지에서 마켓컬리로 전복을 시켜 먹어도 그것보단 전복을 많이 넣고 밥을 한다. 심지어 그게 2인분이라고 했다. 전복 부스러기 같은 전복 서너 점(온전한 한 개도 아니었다.) 올려놓고 전복솥밥이라고 하다니 좀 많이 웃겼다. 차라리 전복향 솥밥이라고 하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래도 갈치는 아주 실했고 새우장도 맛있었다. 야무지게 갈치를 조졌다. 상대적으로 어린(?) 사무실 멤버 둘은 먹을 게 없다고 젓가락을 움직이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가만히 다른 사람들 먹는 걸 구경했다(사실 이미 조식 뷔페를 거하게 먹고 오기도 했다.). 밥상을 보니 초딩입맛을 가진 두 사람이 먹을 건 진짜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호텔에서 조식 뷔페가 잘 나왔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영 미안할 뻔했다. 과거에 가족여행으로 꽤 길게 제주도 여행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실제 초딩이었던 우리 막내동생은 어딜 가도 먹을 게 없다면서 울다가 제주 시내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 지금은 순대국밥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 되어버렸는데 여전히 좀 초딩입맛이긴 하다.
제주도는 초딩 입맛에게는 좀 가혹한 면이 있다. 어딜 가나 좀 비릿한 바다내음을 풍기는 해산물이 있고, 몸국이나 보말칼국수처럼 이름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 많다. 그리고 뜬금없이 음식에 고사리가 올라가거나 익숙한 미역국에 성게를 넣어버리기도 한다. 말고기, 꿩고기처럼 잘 먹지 않는 고기류도 많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걸 먹어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왔거나 초딩입맛이라면 먹을 만한 식당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관광지에 꼭 수제버거집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몸국은 이름이 영 이상해서, 뭔가 잡생선의 몸통으로 끓인 추어탕 같은 것인가 싶어서 시도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군법무관 복무 중이던 친구가 '김희선 제주 몸국' 가게에 데려가 준 이후로 몸국 광인이 되었다. 몸은 몸통의 몸이 아니고 모자반의 제주 방언이었다. 굳이 육지 음식 중에 몸국과 비슷한 것을 찾자면, 정확하진 않지만 감자탕에서 감자를 빼고 해조류를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주 방언으로 몸국 맛을 표현할 때 베지근하다고 하는데 몸국을 먹어보는 순간 '아 이게 베지근한 맛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다. 전에 제주시장에서 모자반을 좀 사갈까 고민도 했는데 돼지내장까지 손질해서 육수를 우릴 자신은 없어서 그냥 냉동 몸국을 사서 집에서 한 팩씩 끓여 먹는다.
조식 뷔페로 배를 채운 사람들과 갈치를 야무지게 조진 나머지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산책을 했다. 나는 다른 변호사님이랑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다른 사람들 것까지 커피를 사 왔다. 오래된 집을 카페로 만든 곳이었다. 카페 사장님한테 인테리어가 너무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좀 수줍어하셨다. 빵 종류도 꽤 있었는데 갈치를 야무지게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불러서 빵까지는 먹지 못했다.
제주도에는 오래된 집을 카페나 음식점으로 바꾼 가게가 굉장히 많았다. 그만큼 오래된 집도 많았다. 같이 간 변호사님이랑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 변호사님은 바다랑 너무 가까우면 무서워서 안 되고, 바닷가지만 살짝 언덕 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발견한 예쁜 집 한 채를 콕 찝어서 "이 집이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또 제주도는 택배비가 너무 비싸서 못 살 것이라고 또 궁시렁거리고야 말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망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