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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Dec 07. 2022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제주

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4일 차

3박 4일의 짤막한 제주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드디어 오롯이 혼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이 따끈따끈해서 일어나서도 한참 누워있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다른 사람들이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씻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씻으러 갔는데 어제는 잘 나오던 온수가 갑자기 안 나왔다. 온수조절 버튼을 누르지 말라고 쓰여있는데 누군가 기어코 그걸 누르고 만 모양이다. 이미 옷을 다 벗은 터라 다시 입고 나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찬물로 씻었다. 머리가 숏컷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찬물을 맞고 있으니 그냥 호텔이나 예약할걸 싶어 졌는데, 그냥 참고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하지 말라는 짓을 꼭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왔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비가 온 어제를 보상이라도 하듯 날씨가 너무 맑았다. 일단 근처에 가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제주 흑돼지 라면을 파는 곳이 있다고 해서 좀 궁금했다. 돈코츠라멘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은데 굳이 라멘이 아니라 라면집인 게 마음에 들었다. '제주와함께라면'이라는 제주스러운 이름의 라면집이었다. 평소에는 웨이팅이 있는지 입구에 태블릿이 놓여있어서 대기번호를 접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라면을 먹는 사람은 없어서 나는 1등으로 아무도 없는 텅 빈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주도의 흔한 라면집 뷰


사장님은 아주 친절했다. 라면이 살짝 칼칼한데 괜찮겠냐고 물어보시더니 기름 국물이라 튀면 잘 안 지워진다면서 앞치마를 가져다주셨다. 불닭볶음면도 전혀 안 매워하는 편이라 칼칼한 것은 괜찮다고 했다.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금방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다른 테이블을 채웠다. 라면집에서도 창밖으로 바다가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해변뷰의 라면집이라니 제주도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들다. 흑돼지라면은 국물이 아주 맛있었다. 돼지고기로 우린 국물인데도 느끼하지 않아서 좋았다. 어제 술을 더 먹었어도 해장이 다 되었을 것 같은 맛이다. 옆 테이블엔 우르르 모자를 쓰고 나타난 가족이 와서 라면을 시키고 있었는데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자기가 쏜다면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라면을 먹으면서 뭘 할까 생각했다. 날씨가 맑아도 제주도엔 딱히 뭐 대단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나는 수학여행 장소가 제주도로 정해졌던 10대 때부터 일관적으로 제주도 여행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제주도엔 늘 하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나는 자연경관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느 지자체의 아이디어로 대충 만들어진 컨셉 없는 관광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주도는 늘 재미가 없었다.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길게 다녀왔을 땐 거의 모든 제주의 관광명소를 다 돌았고(심지어 제주공룡랜드까지 갔다.), 혼자 제주에서 1박 2일 여행을 했을 때도 어떻게든 할 일을 만들어보려고 택시타고 여기저기 가로질러 다녀봤지만 그렇게 대단한 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 문득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게 많다면 나는 또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돼서 조급했을 것이다. 무언가 경험을 더하는 여행도 행복하지만,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무게들을 덜어놓는 여행도 정말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는 아무래도 일상의 풍경과 동떨어져 있어서 평소의 나와 조금 거리를 둘 수 있다. 끊임없이 바람이 불고 파도소리가 들린다. 특별히 뭘 꼭 해야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천천히 나를 돌아볼 수 있다. 그냥 힘겨웠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맛있는 음식 먹으며 푹 쉬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제주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기에 비로소 제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뭘 할까 고민하면서 카카오맵을 뒤적이는데 근처에 하가리 연꽃마을이라는 곳이 있었다. 하가못이라는 연못이 예쁘다고 해서 거길 가기로 결정했다. 2.2km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날씨가 좋아서 걷기에 딱이었다. 30분 조금 넘게 걸어가는 길에는 계속 예쁜 꽃들과 돌담이 나왔다. 걷다가 멈춰서 꽃 사진도 찍고, 예쁜 집들 사진도 찍었다. 제주도의 돌담은 언제 봐도 특이하다. 제멋대로 생긴 돌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꿋꿋하게 담이 되어 버티고 있는 모습이 꼭 우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어서 삶을 버텨내는 것이다. 


하가못 근처의 '주제넘은서점'이라는 독립서점에도 갔다. 검색해서 찾아봤을 땐 안 쪽 공간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당연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사장님이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며 못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공간은 대학가 원룸보다 좀 작은 정도 사이즈에 한정되어 있었고, 안타깝게도 볼 게 많지는 않았다. 그림책들은 너무 무거워서 뚜벅이 여행 다니는 길에 사긴 어려웠고, 그 외에는 정말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 없었는데 그래도 독립서점에 가면 반드시 책을 사고 나온다는 나만의 고집이 있어서 어렵게 골라 책 한 권을 사들고 나왔다. 



하가못은 참 예뻤다. 제주도에서 가장 깊고 넓은 연못이라고 했다. 연못 중앙의 정자를 중심으로 누가 봐도 포토존이었다. 연잎이 동동 떠있는 하가못에서 돌담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세상이 멈춘 것마냥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바쁜 월요일 아침에 넓은 연못에 혼자 조용히 있으니까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있는 오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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