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갱도요새 Dec 05. 2022

제주도에서 물멍하는 하루

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3일 차

래디컬 브루잉 클럽에서 수다를 떨면서 40분을 기다렸다. 1시가 되자 사장님이 주문을 받으러 나왔다. 너무 애타게 기다렸던 터라 "저희 40분 기다렸어요!"라고 하면서 신나게 후다닥 카운터에 갔더니 사장님이 "어휴, 바로 주문받을게요." 하며 웃었다. 커피 원두가 엄청 다양했다. 매달 컨셉이 바뀌는 원두 라인업도 있었는데 이번 컨셉은 술 같은 커피라고 했다. 사장님이 엄청 친절하게 아이스로 먹는 게 더 좋다고까지 설명해주셨다. 평소에 산미가 있는 커피를 즐기진 않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어서 피냐콜라다 느낌이 난다는 원두를 골랐다. 


커피를 주문하며 옆을 슬쩍 보니 11월까지만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고 쓰여있었다. 사장님한테 이렇게 좋은 카페인데 왜 문을 닫냐고 물어봤더니 라떼나 다른 음료 종류가 없고 원두 종류만 많아서 관광지에서 카페를 찾는 손님들 특성이랑은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관광지 카페들은 다 비슷해졌다. 지역 명물이 들어간 머시기 라떼, 머시기 에이드, 인스타 갬성 뿜뿜하는 인테리어. 제주도라면 우도 땅콩 라떼, 제주 말차 라떼, 한라봉 에이드 같은 걸 팔겠지. 커피에 진심인 사람은 갈수록 좋은 카페 찾기가 힘들다.



밖엔 계속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한참 기다린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은은한 코코넛 향이 나면서 진짜 술 같은 느낌이었다. 딱 피냐콜라다를 마시는 느낌은 아니고 피냐콜라다 마시는 사람을 옆에 두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다. J변호사님은 럼 느낌이 나는 커피를 골랐다. 한 입 먹어봤는데 그것도 특이한 맛이었다. 평소에 럼주를 즐겨먹지는 않아서 럼 느낌이 나는 커피는 도대체 뭘까 하고 마셨는데 역시나 피냐콜라다처럼 직관적으로 딱 와닿는 맛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참 책을 읽었다. 카페 통창으로 도로랑 바다가 보였다. 제주도는 어딜 가나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많아서 즐겁다. 비가 꽤 오는데도 저 멀리 선착장에서 배가 나가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빵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침 에그타르트 페이지를 읽고 있던 순간 J변호사님이 "에그타르트 드실래요?" 하더니 에그타르트를 주문했다. 페스츄리 가루가 파스스 떨어지는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였는데 진짜 맛있었다. 에그타르트는 맛이 없기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되게 맛있기도 쉽지 않은데 되게 맛있는 편이었다. 사실 따끈따끈한 빵은 뭔들. 순식간에 뚝딱했다.


비가 계속 와서 정말로 할 게 없었다. 우리는 차라리 비가 와서 물멍하기 좋다고 웃었다. 그래도 정말 너무 할 게 없어서 근처에 절이 있으니 절에 가자고 했다. 비 오는데 절에 가는 것도 조용하니 좋을 것 같았다. 각자 우산을 펼쳐 들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15-A코스를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보광사라는 절이 하나 나온다. 원래는 올라가는 길에 바다가 쫙 보인다고 하는데 비 때문에 날이 흐려서 별로 볼 만한 뷰가 없었다. 



은근 오르막길이라 한 20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도 좀 멀게 느껴졌다. 계속 비가 와서 더 그런 것 같다. 들어가는 길에 종이 있어서 종을 치고 싶었는데 뭔가 치면 안 될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예전에 낙산사에서는 종을 열심히 쳤는데 좀 아쉬웠다. J변호사님한테 "우리 종 치고 튈까요?"라고 물어봤더니 J변호사님은 벨튀하는 거냐고 어이없어했고 나는 차마 실행에 옮길 용기는 없었다. 나중에 절에 자주 다니는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절에 있는 종은 원래 쳐도 되는 거라고 했다. 


불교를 믿지는 않는데 절에 종종 다니는 부모님이 하는 걸 지켜본 가닥이 있어서 들어가는 길에 나름 합장을 해보았다. 절에 오면 항상 차분해진다. 평소에도 일 하다가 화가 나거나 마인드 컨트롤이 잘 안 되면 반야심경을 틀어놓곤 한다. 목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절에 온 것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의뢰인들의 한탄을 듣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업종이다 보니 나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다. 가끔 나는 변호사가 한풀이해주는 무당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대웅전 가서 삼배라도 해야지 싶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대웅전이 잠겨있었다.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뭘 둘러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절이라 그냥 다시 쭈르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길에 보니 나무 한 그루에 동백꽃이 벌써 피어 있었다. 11월 말이나 되어야 꽃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좀 성질이 급한 꽃들인가 보다. 절 앞에 핀 성질 급한 꽃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했다.


계속 비가 오고 정말로 할 게 없었다. 숙소에서 캔 맥주 한 캔씩 비우면서 수다를 떨다가 정말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우리는 또 일찌감치 횟집에 갔다. 근처에 진짜 맛있는 고등어회를 판다는 횟집을 찾아 전화를 했더니, 사람 없는 시간이라고 그냥 오면 된대서 아무 망설임 없이 바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도 계속 비가 왔다. 혹시나 지나가는 차들이 물을 튀길까 조심하며 걸어갔다. 횟집 이름은 고내횟집만큼 심플한 '해변횟집'이었다. 제주도 맛집은 이름을 시크하게 짓는 것이 특징인가 보다.


돌돔을 먹으려고 했더니 오늘은 돌돔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방어회 소자랑 고등어회 소자를 주문했더니, 사장님이 둘이서 그걸 먹을 수 있겠냐는 식으로 "원래 회 좀 잘 먹어요?"라고 제주방언 억양으로 시크하게 물어봤다. 너무 많이 시켰나 싶어서 어버버하고 있었더니 적당히 8만 원어치에 맞춰서 방어랑 고등어를 갖다 준다고 하셨다. 스끼다시로 전복이랑 멍게가 나왔는데 둘 다 싱싱하고 맛있었다. 아직 멍게 맛은 잘 모르겠어서 초고추장 맛으로 먹는다. 멍게에서 느껴지는 그 바다 맛이 멍게 맛인 걸까? 그래도 멍게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 야무지게 먹었다. 또 청하 1병이랑 소주 1병을 각자 시켰다.


회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고등어를 얹어 먹으라고 양념한 밥이랑 묵은지도 갖다 주셨는데 그게 진짜 미친 맛이었다. 고소한 맛 솔솔나는 깨 들어간 밥. 고등어 얹어서 먹었더니 비린 맛은 하나도 없고 우주를 헤엄치는 것 같은 맛이었다. 방어랑 묵은지 조합도 엄청났다. 방어엔 역시 묵은지다. 스끼다시로 나온 전복 상태가 좋아서 전복회도 추가로 더 시켰다. 3만 원인데 큰 전복이 여섯 개나 나왔다. 너무 만족스러웠다. 청하 한 병을 순식간에 다 비우고 남은 소주를 좀 더 먹었다. 그리고 고등어회 소자를 한 번 더 시켰다. 전복에 고등어까지 추가로 시켰더니 사장님은 더 이상 회 잘 먹냐는 질문을 하지 않고 갖다 주셨다. 



회를 다 먹고 매운탕까지 야무지게 해치웠다. J변호사님이 요즘 일과 관련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줬다. 송무일을 하다 보면 쉽게 지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나도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서 내 나름대로 생각했던 얘기들을 해줬다. 더 어렸던 과거의 내가 듣고 싶었을 대답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결국은 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들을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어서 J변호사님도 자기 나름의 답을 찾으리라 믿는다. 지금의 나도 완전히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예전보다는 좀 더 맷집이 좋아졌다. 


다 먹고 J변호사님은 짐을 싸서 제주공항으로 갔다. 잘 가라고 인사하고 택시 타는 것까지 보고 혼자 술을 먹으러 어제 갔던 마일스 바에 또 갔다. 일요일 밤이라 그런지 어제보다 사람이 없었다. 혼자 책을 볼 거라서 무난하게 얼그레이 하이볼을 시켰다. 안타깝게도 내가 싫어하는 스모키 얼그레이 시럽이었다. 분명히 포모나 믹솔로지 시럽을 썼을 것이다. 랍상소총 같은 차만 봐도 호불호가 엄청 갈리는데 왜 얼그레이 하이볼에는 냅다 스모키 얼그레이 시럽을 넣는지 모를 일이다. 내 취향에는 훈연향이랑 베르가못향이 섞인 게 썩 유쾌하지 않다.


술을 마시면서 가볍게 '요즘 사는 맛'이라는 책을 읽었다. 먹고사는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변호사가 되어 일을 시작했던 첫 해에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뭐라도 법률문서가 아닌 글을 읽고 싶어서 출퇴근길에 박경리의 '토지'를 꼬박 1년 동안 읽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토지를 읽었다. 토지보다 더 다양한 군상의 의뢰인들을 만나고 좀 더 단단해진 지금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 그 자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소설보다도 에세이를 더 즐기게 된 것 같다.


책을 다 읽을 때 즈음 갑자기 나타난 커플이 소파 자리에 앉아 너무 뜨겁게 애정행각을 펼치길래 술만 마저 호로록 다 마시고 일어났다. 책 보는 사람보다는 뜨겁게 사랑 나누는 커플이 더 제주의 밤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 내린 뒤 비 내리는 제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