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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Nov 29. 2022

별 내린 뒤 비 내리는 제주

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2, 3일 차


회에 소주랑 청하를 비우고 밖으로 나와 또 술을 먹으러 갔다. 사진으로 분위기가 너무 좋아 보여서 제주도 가기 전부터 찜해놨던 '마일스'라는 LP바였다.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실제로도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계속해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밤바다가 보이는 넓은 창이 예뻤다. 낮에 오면 더 예쁠 것 같았지만 결국 밤에만 이틀 연속 방문했다.


술을 시키면 신청곡을 써낼 수 있는 종이를 하나씩 주는데 바 분위기에 맞는 노래만 틀어준다고 했다. 신청곡을 한 곡 밖에 못 써서 뭘 써야 하나 한참 심사숙고했다. 최근에 위플래쉬 인 콘서트 공연에 다녀온 것이 문득 생각나서 후안 티솔의 캐러밴을 신청했다. 위플래쉬 ost 버전으로 틀어 달라고 신청했는데 듀크 엘링턴 버전으로 틀어줘서 영화보단 좀 많이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위플래쉬 ost 버전은 드럼이 너무 빡세고 템포도 빨라서 바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바에 위스키도 이것저것 종류를 다양하게 구성해놓아서 마음에 들었다. 아드벡과 탈리스커가 라인업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장님이 손님들한테 피트 위스키를 영업하려는 숨은 야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위스키를 먹자니 뭔가 제주 여행의 특색이 없는 것 같아서 제주를 컨셉으로 한 칵테일을 각자 한 잔씩 시켰다. 제주 술 '니모메'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시켰는데 새콤달달하니 맛있었다. 시트러스 계열 칵테일은 어지간해선 실패하지 않는다. '니모메'는 쌀이랑 귤껍질을 가지고 만드는 발효주인데 가격 대비 아주 맛있고, 전통주라 인터넷 택배로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제주 술 중 단연 1등이다.



전날도 술을 먹었고 다음 날도 또 술을 먹을 예정이라 칵테일 한 잔씩만 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걸어가는데 하늘에 별이 잔뜩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밤에도 늘 번쩍번쩍 밝은 서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문득 길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별이 사라진 밤하늘을 평생 보고 자랐으니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모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빛나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니 집에 두고 온 고민거리들이 좀 작게 느껴졌다. 결국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대자연이다. 우리는 꽤 오래 별을 올려다보았다.


숙소로 돌아와 방에서 맥주 한 캔씩 까먹으면서 또 한참을 떠들었다. 먹고살기 힘든 얘기, 가족 얘기, 일 얘기, 먹는 얘기, 내일 뭐 할지 얘기. 나는 배가 터질 것 같았는데 J변호사님은 그 와중에 군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진짜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이다. 제주도에 왔으니 숙취해소도 깨수깡 한 캔으로 마무리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풍경이 예뻤다.


다음 날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원래 워크샵 일정이 있었던 토요일에 온다고 했는데 비가 하루 미뤄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 올레길을 걸으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일정이 틀어졌다. 일단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뻤다. J변호사님은 아침을 원래 안 먹는다고 하고, 나도 아침은 그릭 요거트나 시리얼 정도로 간단하게 먹는 편이라 11시쯤 나가서 아점을 먹기로 했다. 아무것도 급한 일 없이 늘어져 있는 아침이 기분 좋았다. 평소에는 매일 아침에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는 편이라 여유 있게 누워있을 짬이 없어서, 제주에서 쉬는 김에 이불의 온기를 맘껏 즐겼다. 빗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잠깐 창문을 열어놨는데 바람이 너무 차서 금방 다시 닫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순간이 소중했다.



'화연이네'라는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J변호사님은 성게 미역국을, 나는 몸국을 먹었다. 몸국은 너무 잡뼈를 써서 끓였는지 자꾸 작은 뼈가 이빨에 씹혀서 먹다가 휴지에 뼈를 뱉어야 했고, 모자반의 양도 적어서 식감이 잘 안 느껴졌다. 하지만 직접 만든다는 김치와 밑반찬이 진짜 맛있어서 그걸 팔면 좀 사가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비 오는 아침에 숙소 근처에 이런 정도의 식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했다. 아침식사 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천천히 밥을 먹고 '애월책방 이다'라는 독립서점에 갔다. 작은 공간이었는데 사장님의 취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독립서점에 방문하면 언제나 남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흘러나오는 노래 하나하나가 너무 차분하고 빗소리와 잘 어우러져서 노래만 듣고 있어도 하루 종일 행복할 것 같았다. 음악 선곡만으로도 사장님이 큐레이션 장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장님 글씨체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 엄마의 글씨체를 닮아서 더 정이 가는 서점이었다.


사장님이 '모든 사람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라고 자필로 추천문구를 적어 놓은 손준수 작가님의 '82.7'이라는 책을 골라 들었다. 사장님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하시면서, 책 만드신 분이 식물 연구가인데 책 만드는 것에 정말 진심인 분이라 책을 디테일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해주셨다. 82.7은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고, 책이 총 82.7페이지로 되어 있어서 마지막 장은 0.3장씩 귀퉁이를 다 직접 수작업으로 자른 책이라고 한다. 책에서 향도 난다고 설명해주시는 사장님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눈은 항상 빛이 난다.



서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블라인드 북이었다. 책을 보이지 않게 포장해놓고 사장님이 글귀를 하나씩 자필로 적어놓은 걸 보고 책을 고르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누군가가 이 책방에 서서 고민하고 있을 문제의 해답이 되거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J변호사님에게 선물할 책 하나랑 나에게 선물할 책을 하나씩 골라 들었다. 총 세 권의 책을 사들고 나왔다. 아무래도 요즘은 리디셀렉트나 밀리의 서재 같이 책 구독 서비스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책을 덜 사게 되는 편인데 그래도 독립서점에 가면 꼭 한 권 이상은 사 갖고 나온다.


바로 근처에 '래디컬 브루잉 클럽' 애월점이 있어서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기로 했다. 12시 20분쯤 카페에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한 시부터 주문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다른 카페에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앉아서 40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좋은 원두에 잘 내린 드립 커피를 만나려면 40분쯤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카페인 수혈이 안 돼서 너무 괴로웠고 계속 커피 커피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J변호사님한테 아까 산 책을 선물했더니 책 선물을 진짜 오랜만에 받는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내용의 책일까. J변호사님에게 조금이나마 의미가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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