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갱도요새 Nov 25. 2022

회 먹다가 민호랑 낑깡밭 일구기

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2일 차

나는 늘 계획을 세워서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한 번 가려고 하면 숙소부터 시작해서 온갖 예약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했다. 예약을 하고 나면 세부 일정까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대학생 시절 처음 가본 유럽 배낭여행은 여행 계획만 한글파일로 27페이지를 넘었다. 그런 것보단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은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계획 없이 지내는 것이 계획이랄까. 2박 3일 정도는 아무 계획 없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방에서 혼자 지내면 영 심심하고 적막할 것 같아 일부러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다행히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았다. 애월 고내포구의 '하버 하우스 웨스트'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호스트님이 어릴 때 살던 2층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힙한 LP바도 있고, 근처에 바닷가도 있고, 바닷가가 있으니 횟집도 있었다. 심지어 올레길 두 코스가 만나는 지점에 있어서 아무 올레길이나 골라서 출발할 수 있었다. 너무 마음에 쏙 들었다. 다행히 같이 1박을 더 놀기로 한 J변호사님도 게스트하우스가 맘에 쏙 든다고 했다.



하버 하우스 웨스트는 음악을 컨셉으로 한 공간이었다. 호스트님이 아티스트임이 분명했다. 공용공간에는 피아노, 베이스, 칼림바가 있었다. 턴테이블에서 계속 노래도 흘러나왔다(근데 LP가 돌진 않고 그냥 블루투스 스피커로 작동하고 있었다.). 앰프를 보니 원래 기타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타는 없었다.


분명히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열심히 쳤던 것 같은데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니 칠 수 있는 곡이 하나도 없었다. 수행평가로 쳤던 캐논은 악보가 기억이 안 났고, 그렇다고 젓가락 행진곡을 치자니 너무 피아노 못 치는 사람의 클리셰 같았다.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든 치고 싶어 연습했었던 비창 소나타의 1악장은 아예 생각이 안 났다. 내가 기억나는 건 하농뿐이었다. 도미레파미솔파라 레파미솔파라솔시 뚱땅뚱땅 쳤더니 J변호사님이 '그걸 기억해요?'라고 충격받아했다.


기타 치면서 이글스의 데스페라도를 겁나 멋있게 부르고 싶은 로망이 있다. 기타는 칠 줄 모르고 데스페라도도 여전히 가사를 잘 모르지만. 아무튼 기타 치면서 데스페라도를 부르는 사람 특유의 멋진 바이브가 있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기껏 배운 피아노마저 까먹어버린 뚱땅한 존재일 뿐이었다. 뚱땅뚱땅. 기타를 배우고 싶은데 악기는 배우는 기간 동안 내가 만들어 내는 소음들을 참아야 하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내가 잘못 누른 건반들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언젠가 꼭 기타 치면서 데스페라도를 부르고 말 것이다.


하버 하우스 웨스트는 악기 이름이 붙은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게스트들이 공용공간을 같이 나눠 쓰고, 각자 방에서 잠을 잔다. 이틀 다 같은 방에서 자면 아쉬울 것 같아서 하루는 '베이스룸', 하루는 '드럼룸'을 예약했다. 베이스룸은 1인실이고 드럼룸은 2인실이었는데 나는 베이스룸이 더 아늑하고 좋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 멋스러워서 이런 공간에서 성장한 사람은 아티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고내포구는 어촌마을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작은 포구였다.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곳은 아닌지 관광지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길에 고양이들이 돌아다녔고,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곳도 많았다. 관광객들이 없다 보니 동네가 깨끗하고 좋았다. 저녁시간도 다가오고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5시에 곧바로 근처 횟집으로 이동했다.


횟집 이름도 시크하게 '고내횟집'이었다. 100% 자연산 활어만 판매한다고 해서 좀 기대했던 횟집이다. 2인분으로 주문할 수 있는 회는 돌돔, 황돔, 쥐치가 있었다. 돌돔은 너무 비싸서 황돔을 시켰다. 잡다한 스끼다시 없이 전복과 소라를 주고, 전을 하나 줬다. 전복이랑 소라가 오도독꼬도독 진짜 맛있었고 따끈따끈한 전도 아주 맛있었다. 밑반찬으로 나왔던 무말랭이도 진짜 맛있다. 요즘 수온 상승으로 제주도에 소라가 귀하다고 하던데. 환경문제를 생각하면 자꾸 가슴 한켠이 답답하다.



나는 회를 정말 좋아하는데 한국의 회 문화와 일본의 회 문화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일본은 와사비와 간장만 찍어서 생선 자체의 맛을 음미하는 편인데, 한국은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마늘을 넣은 쌈장에 고추나 묵은지, 온갖 쌈채소를 곁들여 쌈을 싸 먹는다. 일본은 회의 맛, 한국은 회의 식감에 더 중점을 두고 먹는 것이다. 간혹 회를 쌈 싸 먹는 건 생선 맛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회 쌈은 맛있는 쌈 채소에 생선 식감이 더해져서 굉장한 맛이 난다. 활어회는 식감이 뽀도독쫀득하고 오래 씹어야 돼서 회만 먹기보다는 쌈으로 먹는 게 더 길게 맛을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아무래도 숙성회를 많이 먹다 보니 사르르 녹는 식감이라 쌈으로 싸 먹기엔 적합하지 않다.


나는 어떻게 먹든 다 좋다. 회는 비리지만 않으면 언제나 옳다. 그래서 간장에도 찍어먹고, 초장에도 찍어먹고, 쌈도 싸 먹었다. 일본스럽게 회를 먹을 땐 사케를 먹는데 아무래도 회를 쌈 싸 먹을 때는 청하를 먹어야 한다. 같이 간 J변호사님은 청하를 안 좋아해서 소주 한 병, 청하 한 병을 시켜서 각자 먹었다. 회에 청하는 진짜 미친 조합이라서 금방 호로록 마셨다. 전이 너무 맛있어서 혹시 전을 더 주실 수 있는지 사장님한테 물어봤는데 너무 흔쾌히 가져다주셔서 감사했다. 매운탕도 미친 듯이 맛있어서 결국 청하를 다 먹고 소주를 더 먹었다.


바닷가에서 먹는 회랑 술은 사람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우리는 이상형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연예인 중에 외모만 놓고 보면 누가 가장 이상형이냐는 시답잖은 얘기였다. 나는 마크 해밀의 스타워즈 4편 시절을 꼽았다 (사실 여태 스타워즈를 한 번도 보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딱 한 명하고 하루만 사귈 수 있다면 누굴 고르겠냐는 질문에는 크리스 헴스워스와 드웨인 존슨으로 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긴 너무 어려웠는데 크리스 헴스워스가 먼저 떠올랐으니 크리스 헴스워스라고 해야겠다. 갑자기 드웨인 존슨이랑 소주 먹고 싶다.


J변호사님은 한국 연예인 중에 고르라고 질문을 바꿨다. 비트의 정우성이라고 했더니 그렇게 노잼인 대답은 안 된다고 했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박쥐의 송강호(다른 영화는 안 된다.)라고 했다. 취향이 이상하다는 야유를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변태 같은 답변인 것 같아서 샤이니의 민호로 대답을 정정했다. 민호는 진짜 너무 잘생겼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와중에 민호랑 하루 사귀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아주 흥겨웠다. 둘이서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는 집에 살며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가꾸는 상상까지 하고서야 술잔을 내려놓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스트 원 텐미닛, 부자가 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