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제주 - 제주여행 4일 차
하가못을 둘러보고 근처에 전통찻집이 있다고 해서 가려고 했는데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대신 밀크티를 파는 카페가 생겨있었다. 하가못 같은 풍경에는 전통차가 딱이라고 생각했던지라 약간 뚱한 마음으로 밀크티 가게에 들어갔다. '네꼬야밀크티샵'이라는 이름도 뭔가 내가 기대했던 고즈넉한 느낌(?)이랑 너무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인테리어가 너무 예뻐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사장님이 친절하게 밀크티 종류별로 다 설명을 해주셨다. 종류가 꽤 많았는데 평소에 차에 우유, 설탕, 꿀 같은 걸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차로 마시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좀 길게 고민했다.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얼그레이를 마실까 했는데 그래도 역시 제주도에 왔으니 호우지차밀크티를 먹기로 했다. 호우지차는 녹차잎을 한 번 볶은 것인데 엄청 구수하다. 녹차처럼 녹색이 아니라 갈색빛이 난다.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즐겨 먹는 차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에서도 많이 팔고 있다.
사장님이 밀크티를 예쁜 병에다 담아서 컵도 같이 주셨다. 병이 너무 예뻐서 집에 가져와서 씻어서 올리브오일 소분용 병으로 쓰고 있다. 밀크티가 아니라 전통차였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으로 컵에 밀크티를 따라서 한 모금 딱 마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소름이 쫙 돋았다. 순식간에 밀크티를 반 정도 벌컥벌컥 들이켰다가 아껴 먹으려고 멈췄다. 썩 내키지 않았던 밀크티가 이렇게 맛있다니!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라고 외치는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앉아서 책을 좀 읽다가 또 뭘 할까 고민했다. 근처 한담해변에 가서 바다 구경을 하고 올레길을 걸어서 숙소까지 돌아가면 비행기 시간이 얼추 될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중간까지 가서 한담해변까지 15분 정도를 걸었다. 한담해변은 제주의 관광지 모습 그 자체였다. 유명한 랜디스도넛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동안 한적하게 다닌 게 무색할 정도로 해변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온갖 카페와 식당이 무질서하게 펼쳐져있었다.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인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서너 명씩 무리 지어 다니며 인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다에서 탈 수 있는 투명카약이 있어서 타보고 싶었는데 2인승이라 타기가 애매했다. 게다가 5분만 딱 타고 싶은데 최소로 빌릴 수 있는 시간이 30분이었다. 30분이나 홀로 2인승 카약의 노를 젓고 있으면 팔이 빠질 것 같아서 그냥 포기했다. 투명 카약 매표소 옆에는 길게 늘어진 빨랫줄 같은 것에 준치들이 널려있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을 쓸 때의 준치는 아니고 오징어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의미의 준치다(한치와 오징어의 중간이라 중치라고 하다가 준치로 굳어졌다는 말도 있다.). 가만히 늘어져서 모질게 부는 해풍을 맞아야 비로소 맛있어지는 준치를 보니 나도 그냥 묵묵하게 무엇이든 버티면 되겠구나 싶었다.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0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해변에 있는 예쁜 카페에 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8천 원이라 아주 가격이 사악했는데 핸드폰 충전 값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카약 타는 사람들이 보이는 자리였다.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친구들이랑 가족들한테 내가 월요일에 이렇게 평화롭게 놀고 있다고 자랑했다. 월요일에 남이 보내는 해변뷰 사진은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리기 마련이다. 엄마는 "저 바다 위에서 배 타는 사람들은 어떤 인생들일까? 부럽네"라고 카톡에 답해왔다. 엄마한테 다음에 같이 제주도에 카약을 타러 가자고 했다. 드디어 제주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카페에서 충전을 마치고 나와 한담해변 산책로를 잠깐 걷는데 혼자 돌길에서 사진을 찍던 여자분이 돌에 걸려 넘어졌다. 심하게 철푸덕 넘어지면서 돌길에 부딪쳐서 보기에도 너무 아파 보였다. 혼자 여행을 온 것인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분은 약간의 본능적인 비속어와 함께 무릎을 어루만지며 아파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가지고 있는 게 밴드뿐이었다. 마데카솔이라도 챙겨 올 걸. 얼른 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밴드라도 붙이시라고 하며 드렸다. 너무 아파 보여서 괜히 안쓰러웠다.
점심(이라기엔 이미 세시 쯤이었는데 아무튼 점심이다.)으로는 피즈버거를 먹기로 했다. 사흘 내내 회를 먹어서 그냥 수제버거 같은 게 좀 땡겼다. 그저 수제버거 가게일 뿐인데 거의 공장처럼 직원이 엄청 많아서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매장 안에도 손님이 많긴 했는데 아마 테이크아웃 손님이 압도적으로 더 많아서 직원도 많이 필요한 것이지 싶다. 그게 아니라면 피즈버거는 조만간 망할 게 분명하다. 버거는 꽤 맛있었다. 맥주가 생각나는 맛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와서 무작정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속 바다가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예전부터 산이 싫었다. 산까지 가지 않아도 하루하루도 충분히 오르막이다. 바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조용히 곁을 내주었다. 깊게 생각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 곁을 빌려주겠다는 것처럼 가만히 철썩일 뿐이었다. 마침 이런저런 생각할 일들이 많았는데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니 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바닷가라 그런지 계속 바람이 많이 불었다. 제주에선 계속 풍경소리가 났다. 끊어진 전깃줄이 기둥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풍경소리처럼 들렸다.
올레길은 파란색과 주황색이 묶여있는 띠로 길 안내가 되어 있었는데 나 같은 길치에게는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누가 봐도 길처럼 생긴 곳이 있어도 그곳이 아닌 곳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길치인데 지도 어플이 발달하면서 겨우 사람답게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올레길에는 길이 아닌 것처럼 생긴 길(?)도 꽤 많이 있어서 휙휙 걷다가도 자연스럽게 보폭을 줄이게 되었다. 펼쳐진 자연을 보면서도 길을 잃을까 두려웠다. 나는 자꾸 카카오맵을 켜서 올레길 지도를 봐야 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울까. 그냥 걸어가면 결국 어딘가로 도착하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