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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Jun 07. 2020

엄마 되어 보기

80인 엄마로 빙의해서 쓴 글


내가 네 살이던 40년대, 식량이 부족했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산 넘고 강을 건너야 갈 수 있던 지금은 이북이 된 친정집에 곡식을 얻으러 가셨다. 엄마의 뱃속에는 7개월 된 동생도 있었다. 대장간을 하던 외가댁은 살림살이가 여유 있는 편이라 귀한 흰쌀밥도 얻어먹고 약간의 곡식과 집 간장도 선물 받았다. 당시에는 집 간장이 무진장 귀한 시절이었는데 들고 가기 편하게 새끼 줄을 소주 대병으로 추정되는 유리병 주둥이에 걸어 주셨고 무거운 줄 모르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리가 뻐근해지도록 힘들게 걸어 넓은 강물에 위태롭게 놓여있던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강물에 빠져버렸다. 우리 모녀는 어푸어푸 물을 먹으며 거센 물살에 자꾸만 떠내려갔고 커다란 나뭇가지를 붙잡은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엄마가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새끼줄에 주둥이만 남았던 유리병을. 엄마는 삶이 힘들 때마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늘도 회초리를 맞은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었다. 싸리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종아리가 부풀어 오르도록 실컷 맞았는데 엄마로부터 회초리를 맞은 이유는 단지 말도 안 하고 학교에 다녀왔다는 거였다. 많고 많은 형제 중에 엄마가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물에 빠졌을 때 뱃속에 있던 남동생으로 홍 씨 가문의 장남뿐이다. 아래로도 남동생과 여동생이 수두룩하게 있었지만 엄마의 보살핌이나 관심은 오직 장남에게만 향했다. 하지만 장남은 우리 형제 중 유일하게 꼴통이었다. 공부라면 몸을 떨며 질색해서 학교에 보내면 가방을 팽개치고 다리 아래서 놀거나 가방을 메고 산으로 도망갔다. 학교에 가서 미치도록 공부하고 싶은 건 남동생이 아니라 나였다.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고도 배움에 대한 욕구는 포기가 안 됐는데 내가 일은 안 하고 학교에 가는 게 싫었던 엄마는 갖가지 구실을 만들어 일을 시켰다. 여덟 살부터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했고 엄마를 도와 청소와 빨래도 열심히 했다. 눈치를 봐가며 띄엄띄엄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을 마쳤지만 더 이상 학교에 보내달라고 할 형편은 못됐고 엄마 몰래 학교로 가서 교실 창밖으로 보이고 들리는 광경을 훔쳐보는 일이 고작이었다. 




대장간 집 외동딸이던 엄마와 머슴이던 아버지의 결혼은 순탄하지 못했지만 지독히 찌들리는 살림에도 동생들은 자꾸만 태어났다. 일을 싫어했던 엄마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몇 달을 아기만 안고 누워있었고 밥할 생각도 않던 엄마 때문에 집안 살림은 어린 나의 몫이 됐다. 엄마의 배가 부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안일을 도맡아 했는데도 내 나이 열여덟에 입 하나 던다며 아랫마을 조 씨네 집과 혼사가 이루어졌다. 시부모님, 형님 내외, 시동생과 시누이들이 한집에 사는 전형적인 대가족이라 눈칫밥에 동서들 간 시기도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남편은 아이만 만들어 놓고 입대를 해버렸는데, 그 사이 입 하나 던 친정집엔 우리 집 첫째보다 어린 동생이 또 생겼다. 남편의 제대 후 한 동네에서 분가가 이루어졌지만 가정적이지 못한 남편 덕분에 결혼 이후의 삶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딸을 낳으면 아들을 낳으라 했고, 아들을 낳으면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해서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다. 능력 외로 자식을 많이 두었기에 평생을 몸이 부서져라 일만 했다. 




여덟 살부터 아궁이에 불 때가며 밥하던 생각을 하면 넌덜머리가 났고 ‘손재주 많으면 팔자가 세다’길래 일에 파묻혀 살면서도 아이들 손에는 물 한 방울 안 묻히도록 나름 귀하게 키웠다. 부디 아이들의 삶은 나를 닮지 않기를!




내 나이 내년이면 팔십. 지지리 속 썩이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떴고 슬하에 둔 오 남매는 경쟁하듯 나를 챙긴다. 자식 복만큼은 넘치게 가진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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