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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라봉 Sep 09. 2019

여행을 하듯,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휴직하고 여행을 떠난 이유-2


 어린 날부터 회사 4년차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그 시간에 있을 때는 세상이 너무 어렵다고, 순탄치 않다고 생각했는데(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내 인생은 순탄한 편이었다. 그래도 대학을 갔고, 그래도 취직을 했고, 그래도 이렇게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여행하고 있으니까.

가난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살게 만들었다. 


회사 7년차가 되면서 남들만큼 숨을 쉴 수 있게 되니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비집고 올라왔다. 인간의 욕구는 이래서 단계적인가 보다.

계획하고 추진했으면서도 이렇게 휴직을 하고 여행하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가난이 물러가고 돈이 많아져서 휴직과 여행의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더 늦어지면 평생 아쉬운 소리를 할 것 같아서.
모두 내가 선택한 것임에도 사방을 향해 억울함을 표출할 것 같아서.






 부모님이 동시에 병환으로 몸져누웠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시절 더듬으면 병원 냄새가 기억난다. 학교를 다녀오면 고요했던 집도.

부모님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원래도 썩 잘되지 않던 제과점을 접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고 빚이 늘었다.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벌이가 없는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장학금만이 답인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문제집이 없어서 친구들이 하기 싫어하는 학원 문제집 과제를 찾아 대신해주었다. 주요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한 후, 참고 교재로 오는 문제집 중 남는 것이 있다면 주십사 부탁했다. 한두 번 그러자 교무실에 내용이 돌았는지, 신학기가 되면 먼저 불러 문제집을 챙겨주셨다. 참 감사했는데 받아서 돌아오는 길이 왜 이리 먹먹했는지.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학급 반장을 하곤 해서 나 또한 반장이 되었다. 다른 반 반장들처럼 간식을 돌리지 못했기에, 운동회 같은 행사가 오면 마음이 무거웠다. 친구 한 명이 내 마음의 짐을 알아채고, 자신의 부모님께 부탁하여 운동회날 간식을 돌려주었다. 고마운 그 친구는 지금도 연락하며 지낸다.


내가 그 시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공부를 선택한 것처럼, 가족들 모두 힘든 시기를 넘기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했다. 부모님께서는 병환 때문에 당장 일을 하시진 못했지만, 본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셨다. 정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헤아리고 가능한 것을 찾아 신청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부모님께서는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고등학교를 정리하여 알려주셨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등록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대입 전형을 조사하셨다. 각 대학의 입학관리처에 전화하여 궁금한 것은 직접 물어본 후, 전형별 혜택과 기준이 적 종이를 주셨다. 그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부모님을 존경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받아 대학 갔지만 생활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주말 알바와 평일 알바를 병행하며 학업을 했고 시험과 취업준비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학교 축제기간은 단기 알바를 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비가 늦게 들어올 때 하루 한 끼 라면을 먹다.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대학을 입학하며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확정하자고 다짐했다. 당장 취업해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조금씩 움직이며 무리하시는 부모님의 건강이 언제까지 버텨질지 늘 불안했다.  만큼 병원비로 고스란히 나갔다. 없는 시간을 쥐어짜 틈틈이 이력서에 넣을 것들을 만들었다. 그 덕에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늘 정신이 없었.


그런 노력과 운이 만나 동기들보다 빠르게 엔지니어가 다. 회사 생활은 정글 같았다. 처음 삼 년은 어서 열심히 벌어 집에 병원비도 보태고 생계도 나아져야지, 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가끔 아무도 없는 야간 근무를 틈타 숨죽여 울었다. 받는 월급의 70프로 정도를 꼬박 집에 가져다주자 나의 숨통과는 다르게 가정의 숨통은 트이기 시작했다. 월급은 사이버머니 같은 속도로 사라졌.


나만 왜 이렇게 힘든 세상이냐고 혼자서 한탄하던 어린 생각은 일찌감치 안 하게 되었다. 대학 생활이든 회사 생활이든 아픈 시간을 걷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가슴속에 자신만의 무언가를 얹고 있음을 이리저리 부딪히며 알게 되었다.


다만 내 인생은 언제 시작할까, 종종 생각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모은 돈은 거의 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병환이 더 깊어졌을 때는 앞이 암담하고 어두워 보이기만 했다. 설비를 보기 위해 공장에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지금 어둡고 깜깜한 터널을 걷고 있는 거라고, 저 멀리 있는 게 빛일 수도 있으니 저기까지만 걸어가자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 터널이 언제 끝날까, 하는 질문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시절 회사 동료 하나가 웃으며 나를 놀렸다. 집의 지원을 받으며 순탄하게 대학 졸업하고, 걱정 없이 취직 준비에만 몰두하여 한번에 취업 성공한 케이스 아니냐고. 유난히 웃음이 많고, 그늘이 없어 보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당시 가장 어린 나이도 한몫했다. 그 놀림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는 걱정을 싸매고 다니는 사람인데... 내게 그늘이 없어 보이는구나, 몇 년을 봤으면서도 못 사는 티가 안 났나 보구나, 하고 가슴을 쓸었다. 가난한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심 티는 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회사생활 3년차가 되면서 어머니의 몸이 회복되었다. 4년차가 되자, 아버지께서 일어나셨다. 집에 있던 빚도 거의 갚아가던 차였다. 시간이 더 지나 처음으로 월급이 온전히 내 것인 날이 왔다. 기분이 날 것 같이 좋으면서도 이상했다. 같은 월급이지만 그동안 받던 돈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것 같았다.


그 뒤 부서이동을 포함하여 수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사정은 나아졌다. 나는 어느새 전보다 더 편하게 호흡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의 획을 긋게 되었다.


지금은 굳들었던 잘 생각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들 내 사정을 다 알지만, 친구들에게도 술자리 안주나 지나가는 말로라도 옛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손톱 밑 가시 같았던 그 시간을 돌아보고 '그랬었지'라고 감상에 잠겨있는 건 별로 즐겁지 않다. 돈이 없어서 고생한 시간 자체보다 돈 때문에 받았던 굴욕적인 대우들도 기억에서 꺼내고 싶지 않다.

회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좋아하지도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벌써 7년차가 돼버려 그저 아쉽다. 동안 나를 위해 또렷하게 남긴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것만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휴직과 여행을 더 선택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1년 전에지금의 나를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래도 그간의 경험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제법 나다운 일이라는 것.

가능하다면 나다운 일로 더 나아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프라하 한달살기 + 크로아티아 한달살기 = 총 두 달의 한달살기 여행을 하며 느낀 것들을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며 저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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