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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계획형 인간의 브리핑)

by SseuN 쓴

2024년 12월 28일 어느 추웠던 토요일.


여행의 원년 멤버라고 해야 할지. 여행 팀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부르든 우리 셋은 꽤나 많은 여행을 함께해 왔다. 가족끼리 여행 가면 100퍼센트 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행을 함께 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지만 우린 어설픈 친분 관계에서부터 시작한 여행이 쌓여 이젠 꽤나 합이 잘 맞는 편이다. 우린 각자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보유하고 있는데, 역시나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면이 절실하게 나타나는 순간들이 넘쳐난다.


광수는 철저한 계획의 인간이다. 이동하는 동선과 숙소, 입장해야 하는 곳까지 모두 확보된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혹시 계획이 틀어지거나 계획에 변경이 생기면 혼자 방에 틀어 박혀 한동안 말이 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방대한 자료를 볼 수 있는 현대시대에서 광수는 기기들을 이용해 꽤나 많은 공부를 하며 계획을 짜는 편이다. 당연히 다양한 플랜이 있어서 현장 수정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초기 계획에 가장 많은 노력을 투자하고, 우리 두 사람의 여론을 최대한 수렴하면서 계획을 맞춰 짜는 편이다. 세세한 교통비까지 정리하는 편이라 같이 다니면 지금도 그의 계획에 깜짝깜짝 놀라는 중이다.


편은 철저한 팔로워 역할을 한다. 계획이 세워졌고, 여행이 진행되고 있으면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 본인이 못 먹는 음식이 있어 의견을 내긴 해도 철저하게 본인의 의견을 내지 않는 친구다. 그래서 불협이 없다. 의견이 없으니 오해도 없다. 그냥 계획된 일만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체력도 좋아서 오래 걸어가든 뛰어가든 가까이 가던 중요하지 않다.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누군가 물어보기 전까지 절대 의견을 내지 않는다.


아마 여행을 같이 하는 셋 중에 가장 이상한 캐릭터는 결국 내가 아닐까 싶다. 공부할 시간도 없으면서 계획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쏟아내서 광수가 늘 바쁘다. 체력도 저질이라 오래 걸으면 뒤에서 입이 툭 튀어나온다. 가리는 건 없지만 음식에 대한 욕심도 많고, 교통비를 아까워하는 편이라 쉽게 지치는 경우도 생긴다. 나름 여행을 오래 다녔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 많다. 입이 긴 편이다. 쓰고 나니 내가 제일 이상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여행을 이들과 함께 다니다 보니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인다. 잘 고쳐지지 않겠지만...


이런 성격을 가진 우리 셋의 이번 방학에 세운 계획은 가까운 나라 일본의 도시. 오사카를 여행하기로 했다. 오카사는 평소 일본을 자주 다니는 광수의 전략적 요충지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계획이 있고, 늘 플랜 2~4가 있는 곳이다. 광수는 여행으로 일본을 자주 다녀오면서 일본에 문화에 대한 이해도 높고, 지리에도 빠삭했다. 그런 이가 세운 이번 오사카 여행의 계획은 기존의 오사카를 둘러보는 여행에서 조금은 변형된 일정이었고, 우린 그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고 일정을 공유받았다.


우선 여행의 브리핑을 위해 전날 광수네 집에서 합숙을 강행했다. 원래라면 각자의 집에서 집결지로 모인 다음 차를 하나로 만들어 부산 김해국제공항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계획상 그날 중에 가장 빠른 비행기를 선택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곳에 모여 자고 같이 출발하는 계획으로 움직일 수 밖엔 없었다. 그러는 김에 여행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 자리도 만들게 되었다.


남자 혼자 사는 아파트 거실에 남자 셋이 모이자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켜면서 바로 딴 길로 샌다. '롤'(게임)을 시작했다. '페이커' 선수가 제일 유명한 게임인 롤은 우리가 사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주로 하는 게임이었다. 나 같은 경우 지금은 잘하지 않아 게임을 못하지만 간혹 머리 식힐 겸 게임을 하던 친구들은 지금도 게임을 하는 편이다. 컴퓨터에 앉아 롤을 켜고, 브리핑하기 위해 설치한 '스텐바이 미'를 게임방송 중계 마냥 켜두고 맥주 한 캔을 들고 있으니 준비 완료. 원초적 의문이지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깊이 생각하길 멈추고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지만 치열했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정리를 하며 브리핑 모드로 전환했다. 광수는 컴퓨터 자리에 앉아 잘 짜인 엑셀파일을 열고, 우리는 스텐바이 미에 보이는 복사된 화면을 바라보면서 여행에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직은 생소하고 낯선 이름들이 나오긴 하지만 일본의 도시는 전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여행지가 아니니 구글 지도와 함께 보며 금방 적응했다.


'오사카', '나고야', '교토' 흔히 들어본 적이 있는 도시, '시라카와무라', '다카야마'처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작은 도시까지, 이번 여행을 기대하게 하는 수많은 도시의 이름과 다양한 음식의 이름들을 들으며 상상에 빠지게 되어 버렸다. 구글 지도의 기능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의 사진을 미리 확인하면서 앞으로의 여행을 꿈꾸던 우리의 말도 안 되는 브리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처음엔 다 같이 자고 일어나 같이 출발하자는 생각에 한집에 모여 잠을 잤는데, 맥주만 실컷 먹으며 정성스럽게 만든 엑셀로 만들어진 계획표를 읽다가 끝이 났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12시 넘어서 잠이 들게 되었고, 4시간도 남아있지 않은 짧은 시간뒤엔 공항으로 출발하는 차를 운전하고 있을 나를 위에 서둘러서 눈을 감았다.


슬슬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웃긴 우리 세 사람은 여행 계획의 핑계와 공항으로 같이 출발해야 한다는 핑계를 가지고 결국 하루 더 긴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즐겁다고 했던가? 별일 아님에도 웃음이 끝없이 나는 걸 보니 여행 전이 가장 즐거운 것은 맞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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