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울티모"
쿠바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있는 경우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다. 쿠바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단어이고, 쿠바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단어라 실제로 많은 정보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다. 아마 스페인어를 몰라도 쿠바 여행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라 잊을 수 없는 단어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바로 '울티모'이다. 말 그대로 마지막 혹은 끝에 선 사람을 찾는 단어인데, 쿠바 사람들은 줄을 설 때 한 줄로 길게 서 있기보단 뜨거운 해를 피해 삼삼오오 떨어져 서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니 줄이 서있지 않더라도 불편함이 없다. 쿠바에 있다면 은행을 들어가는 경우라던지 물건을 사러 마트나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꼭 '울티모'를 외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이고, 규칙이다. 내가 아시아 여행 중 줄을 서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던 나라를 여행해 본 적이 있다. 먼저와 나중이 없는 그야말로 혼돈의 입장이었다. 그에 반해 울티모의 외침은 생각보다 좋은 약속이다. 줄 길이보다는 내 마지막 사람을 기억 함으로써 순서도 지키고, 자유롭게 설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까삐 뚫리오' 라는 국회 의사당 왼쪽으로 한적한 도로를 지나, 차이나 게이트 안쪽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혁명광장으로 가는 여정을 선택했다. 우려했던 버스는 생각보다 자주 오는 편이고 한 종류의 버스만 다니기 때문에 정류장에서 오는 버스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울티모"
우리도 제일 마지막에 줄 선 사람을 찾아 그 사람 뒤로 가 섰고, 버스비를 바꾸기 위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의 버스비는 아주 저렴했다. 심지어 너무나 작은 동전이라 외국인이 그 돈을 가지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치가 작은 동전이다.
(지금은 정책적으로 이중 화폐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엔 이중 화폐가 존재하고 사용하기도 한단다.)
우린 버스를 탈 수 있는 동전이 없었고, 가지고 있는 돈은 버스비에 12배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지금 대구의 버스비가 1400원이니까 대략 16000원 정도 되는 돈을 들고 있는 샘이다. 이 돈을 다 내고 탈 수 없으니 서둘러 버스가 오기 전에 동전으로 바꿔야 했는데, 한국처럼 버스가판대가 있어서 동전을 쉽게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는 현지 분들에게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몇 분에게 동전을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다행히 앞에 있던 분이 친절하게 자신의 지갑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우리 손에 올려주었고, 우리는 가지고 있던 '1 CUC' (외국인 화폐)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우리의 돈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돈을 드리고 단순히 돈을 바꾸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그냥 우리 손에 버스비 두 명의 동전을 모두 올려주기만 했다. 받으시라 하고 안 받겠다고 하고, 그렇게 우리는 실랑이를 벌였고 한사코 거절만 하던 그녀가 버스에 오르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올라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준 버스비를 기사님께 내며 시원한 창가 자리로 옮겨 섰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는 스스로 내 모습이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련 경우가 생기면 더욱 그렇다. 이곳 쿠바에서만 교통비를 얻은 게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내가 들고 있는 교통카드가 사용이 안되어 당황할 때에 한 할머니가 다가와서 내 버스비를 대신 내어 주셨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터키를 여행할 때 잔액 부족으로 카드를 대고 있어도 버스비 지불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에도 터키 현지 분이 대신 카드를 대어주셨다. 말고도 수많은 경우가 있었는데, 유독 이런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땐, 거울을 가져다주면서 몰골을 보라고 했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버스는 차이나게이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하게 뚫려있는 도로를 달렸다. 버스는 우리가 탄 정류장부터 이미 거의 만원이었다. 출근길 만원 버스는 차도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 위의 이름 모를 정류장에 몇 번 더 서고 나서야 혁명 광장 앞에 도착했다.
높이 솟은 기념탑이 광장 어디서든 보이는 이곳이 바로 쿠바의 혁명광장이다.
쿠바 혁명광장은 조금 심심한 곳이다. 외형이 그렇다는 말이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 러시아 혁명광장과 같이 광장을 상징하는 특별한 구조물은 없다. 주변에 관광객을 맞이할 그렇다 할만한 상점이나 기념품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변 도로는 을씨년스럽다고 할 정도로 한산하고 별 볼 게 없다. 다만 가운데 109m의 혁명 기념탑이 있다. 쿠바 혁명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탑으로 광장에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광장이나 광장 주변으로 대형 건물이나 전광판처럼 반짝거리며 눈에 띄는 구조물은 없지만 쿠바 아바나의 혁명광장에는 혁명을 통해 쿠바를 구했던 영웅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쿠바의 독립을 이끌었던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엔고스', '피델 카스트로'이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잠시 이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이 세 사람은 마치 달타냥에 나오는 삼총사들 같이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는 영웅의 이야기다.
시작은 '피델 카스트로', 그는 쿠바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아바나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쿠바의 현실을 알게 되고 답답한 모습에 변화를 주고자 했던 그는 앞서 이야기한 두 사람과 함께 혁명을 이루게 된다. 혁명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게 되자 그의 정치 평가는 모두 다른 시각에서 해석되지만, 독립의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다음으로 합류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에서 의대를 다니던 '체 게바라' 다. 그가 혁명에 합류하게 된 가장 큰 계시는 대학생 때 남미 일주 여행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나라의 현실을 직접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가난한 남미의 여러 나라의 궁핍한 식민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남미의 곳곳에서 독립 활동을 하다,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되면서 쿠바로 넘어가 그와 함께 쿠바 독립을 돕게 된다. 그의 평가도 사람들 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하지만 젊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가지며 수려한 외모 덕에 여전히 많은 소품에서 그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 혁명광장엔 세 번째 인물 '카밀로 시엔푸엔 고스'도 기리고 있다. 쿠바에서 태어난 그 역시 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뜻으로 함께 했다. 그는 혁명 이후 군에서 장성급으로 근무하며 농업 중심의 쿠바 농업 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의문의 죽음이지만 그 역시 혁명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다른 두 명과 함께 이곳에 남아 있다. 심지어 큰 금액인 20페소에도 그의 초상이 담겨 있고, 광장에서 제일 잘 보이는 국가 건물에 그의 초상이 조형되어 있다.
세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목표인 '혁명'으로 뭉쳐있었다. 당시 여러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성공적인 혁명이라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쿠바의 정치가 조금씩 안정이 된 후에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달랐다. 혁명을 향했던 같은 목표는 같았지만 결국 쿠바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만 얽힌 그들의 관계도 각자의 자리에서 맞이 한 각각의 죽음으로 마치게 된다. 피델 카스트로는 대통령이 되면서 쿠바에 남아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오랜가 간 그와 함께 할 수는 없었다. (대통령으로 쿠바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피델도 결국 16년에 사망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들이었지만 쿠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아직도 쿠바 전역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여기 광장 주변 건물도 그중 하나이다. 광장 주변으로 정부 주요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정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지어진지도 모를 정도로 낡은 흰 벽이 햇빛을 받아 초라하게 보인다. 그 초라한 빛바랜 흰색이 그들을 기념하는 검은색의 선들을 더욱 대비시켜 진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르겠다.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광장에 우리가 방문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았고 복장이 모두 같았다.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광장 내부로 들어서니 가장 좋은 자리에 쿠바 군인들이 사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인들이었는데, 오늘 행사가 있어 왔는지 방송국 카메라도 몇몇 보였다. 그들을 뒤로한 채. 원래 보려고 했던 바래진 페인트 위의 두 사람 얼굴은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기에 없다. 심지어 쿠바에서 죽음을 맞이 한 사람도 둘이나 된다. 한 사람은 미국과 쿠바 사이의 넓은 바다 위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은 볼리비아 정글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곳엔 그 누구 보다, 더 잘 보이는 곳에 그 두 사람이 있다.
먼저 체 게바라는 내무부 건물 외벽에 그려져 있다. 그렸다고 할지 설치되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의 모습 오른쪽에는 다음의 글귀가 적혀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말은 쿠바를 떠나기 전 피델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따온 말이다.
그의 또 다른 동료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모습이다.
피델의 질문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대답했다.
"나 잘하고 있는 거지?" (Camilo, Voy bien)
"피델, 잘하고 있어." (Vas bien, Fidel)
이 쓰여 있다.
문장이 그 문장 그대로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없다. 다만 그들이 이룬 혁명만큼은 쿠바 사람들에겐 중요한 일이고 세 사람들은 이들의 독립에 영원히 기억될 사람들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다. 쿠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혁명을 위해 목숨이 마친 사람, 또 한 사람은 나머지 두 사람과 정치적 이념이 달랐지만 정치적 소신으로 지금의 쿠바를 만든 사람, 마지막으로 쿠바의 농업을 성장시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죽음을 맞이 한 사람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