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입니까?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은 사람이 많이 탄 버스 안에서였다. 밖이 너무 더운 날씨라 에어컨 없는 버스 안에서 가장 좋은 곳이 창문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날 우린 운이 좋게도 창이 열려 있는 버스 기사분 뒷 쪽에 자리 잡고 서서 가는 중이었다. 버스에 타고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정신이 없었다. 쿠바에 오기 전, 스탠리의 여행을 듣고, 스탠리는 나의 여행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르는 어느 때에 버스는 도로 위의 작은 버스 정류장 표시에 맞춰 정류장에 멈춰 섰다. 그 정류장에서 버스 위로 한 콧수염까지 하얗게 새어버린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셨는데, 한국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새하얀 바람 잘 통하는 천으로 된 셔츠를 입고 계셨다.
어르신이 타셨기에 따로 노약자석이 있는 버스가 아니라서, 시원한 입구에 서 있던 우리는 조금 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버스 뒤로 자리를 물러났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다시 우리 이야길 시작했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날에 도착했지만, 아직 할 말이 한참이나 남았던 것이었다. 외국이라 조금은 긴장하면서 수다를 이어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금 버스에 올라 우리가 있었던 자리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갑자기 우리에게 이야길 건네셨다.
"혹시 조선 사람입니까?"
"네?"
우리는 순간 잘 못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 되물어 보기 바빴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짧은 단어로 한국 사람이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아니면 '방탄소년단'이라고 하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내가 먼저 'BTS' 굿즈를 보고 인사를 한 적도 있었다. (한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행하면서 더 느끼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처음 듣는 단어였다. 잘못 들었을 리 없었다. 선명하게 들렸다.
"조선 사람입니까?"
두 번이나 들어 보니 정확한 우리말이었다. 우리말이라고 하면 조금 어색하지만 한글로 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였다. 그래서 스탠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을 했다. 어르신은 생각보다 한국말을 잘하셨다. 심지어 조금 어려운 대화까지도 가능했다. 심지어 우리가 내려야 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한국어로만 대화를 해도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우선 할아버지는 북한에 교환학생으로 몇 년을 지냈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그 말투가 이해가 되었다. 한국어로 이야길 하시는 것 같은데 특유의 억양이 있었다. 아마 북한 억양이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북한으로 유학을 떠난 어르신은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유학을 하셨다. 전공을 물어보기도 하면서 생활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우리를 더 궁금해하셨고, 미디어로 한국을 보면서 궁금했다고 하셨다. 서로 잠시의 쉼도 없이 북한에서 유학하신 쿠바 어르신과 한국에서 멕시코를 여행하고 입국한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꼭 한 번씩은 이렇게 특별한 이벤트가 생긴다. 쿠바에서 쿠바 사람이 우리가 쓰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한 일이라 생각했다. 거기에다가 심지어 여행하길 좋아하는 나도 갈 수 없는 북한의 '평양'에서 유학을 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할아버지는 유학했던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시는지 조금은 특별하게 생각하셔서 그런지 조금은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음 일정으로 우리 가야 할 곳이 있었기에 아쉽지만 이 순간을 사진 한 장으로 기억하기로 하고, 우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우리만 이 사진을 가지고 있을 뿐 어른께 한 장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싶다 해서 찍어둔 사진은 늘 나에게만 저장되어 있다. 반대로 외국인의 사진기 속에 나의 얼굴이 담겨 있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볼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요즘 핸드폰으로 전송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인터넷 통신이 어려운 쿠바에서 메일 주소가 없는 할아버지를 만나거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곳으로 가면 사진이 참 귀하다.
중국과 동남아 여행을 시작할 당시에는 인화기도 들고 다녔다. 핸드폰으로 연결하면 인화지에 사진이 출력되어 나오는 즉석 인화기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짐이 되어 한국으로 택배를 보냈다. 사실 그때보다 아프리카로 들어갈 때, 인도여행을 할 때, 그리고 지금이 절실히 필요할 때인데 막상 손에 없으니 아쉽다. 손에 사진 한 장을 들려 보내 드릴 수 없는 우리의 현재가 조금은 씁쓸했고, 다시 그 어른을 뵙게 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마음 한편이 편하지만 않았다.
어르신과의 대화를 마치고 방향을 돌려 아바나 혁명광장을 다녀왔다. 드넓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밖을 다니게 되었다. 날도 덥고 해를 피할 때도 없으니 등과 겨드랑이에는 땀이 흥건하고 목이 마르다. 생각보다 더운 날이었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지만, 그래도 쉽게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한 블록에 하나씩 보이는 편의점이 쿠바엔 없지만, 가끔 노점에서 음식을 파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광장을 나와 조금 걸으니 도로 위에 행운의 수레가 떡하니 자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그곳으로 홀린 듯이 가까이 갔다. 더운 날씨가 틀림없다는 게, 작은 수레 파라솔 밑에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냉차는 약간 환타 오렌지 맛에 탄산은 없다. 조금 찻잎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성분을 알 수는 없다. 그냥 시원하고 달달한 음료를 먹는 순간이 행운이다. 하지만 한 잔 음료는 말랐던 식도를 시원하고 촉촉하게 적시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도 작은 한 모금을 마셨다고, 금방 기분은 좋아졌다. 움직일 정도의 힘을 얻었으니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혁명광장에도 무사히 다녀오고, 예상치도 못했던 어른을 만나 즐거웠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어쩐지 다 좋았던 생각이 들더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에는 올라왔지만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중이라 버스 기사님께 물었다.
"까피툴리오로 가나요?"
기사님께선 기다리면 간다고 하시면서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의심이 들긴 헸지만 버스는 약속한 경로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기사님은 친절하셨고, 스페인어가 짧아 여러 말은 못 했지만 목적지로 간다는 말에 편하게 앉았다.
우리가 가는 길을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 버스가 처음 출발하는 곳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 버스는 기점을 돌아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노선이었다. 마치 20대에 무작정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버스 종점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알지 못하는 곳의 새로운 풍경을 스치며 생각지 못한 여행이 되었다. 늘 계획대로 될 순 없는 일이다. 사람 사는 곳엔 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거나, 아침에 계획하고 나왔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을 다녀온다거나 하는 것이 그렇다.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나의 몫이다. 그 몫에 따라 나오는 결과도 나의 결과가 된다.
문득 어느 방송에서 나온 문장이 생각이 났다.
"잘 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