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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May 30. 2021

당신들의 모습에서 무슨 진심을 찾으랴

이제와서 청년을 호명하는 진보 언론과 정치인에게

청년문제를 고민하는 주변 분들께 공유하기 딱 좋은, 진보너머 필진 류호성님의 글입니다.


  재보궐 선거 이후 한 달 반 정도가 지나서,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2030 남성의 몰표를 절대로 본인들의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언론과 논평을 통해 쏟아내던 그 사람들이 너무 몰염치하게 느껴져, 뭐라도 몇 마디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록 나 역시 황폐화되는 기분이 들어서 이제는 더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길게 하나 글을 남긴다.


  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청년담론은 전혀 새롭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 청년층 최대 갈등요인인 젠더담론보다 앞서 있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들었나. 대체로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로서 청년을 호명하고, 패자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기는 과열된 경쟁과 승자독식 구조, 고착화된 계급구조 속 희망을 잃은 청년 세대의 미래,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방향이든 해결책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또다른 좌절 요인이었다.


  2010년대 중후반 온라인과 SNS를 달군 젠더담론은 호명하는 집단의 정체성 의식을 더욱 강하게 자극해 주었고, 이내 종래의 지지부진한 성과를 보이던 청년담론을 잠식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 전에는 청년세대를 호명하던 진보진영의 주류 담론을 장악하고, 청년 세대를 반으로 갈라 청년들의 한쪽을 향해선 거꾸로 가열찬 목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들이 이전에 쏟아내던 말대로 신자유주의로 인해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 주저앉아 있을 수 있는 이들 일수도 있는데, 그간 무엇에 홀렸기에 그리도 잔인했는지.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목소리가 너희의 잘못을 꾸짖고 계몽해서, 너희가 왜 탈락하고 낙오되어야 하는지 납득시키겠다는 식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나 좌절스럽고 힘겨운 처지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국가적 권위를 가진 이들의 힘을 빌어 잔인하게 짓누르는 방식이었다. 이들의 경제적 난관, 고립 등은 본인들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섬뜩한 메시지도 퍼져나갔다.


  한국 청년남성의 좌절 끝 자살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비웃는 은어가 만들어졌다. 군대에서 사고를 입고 의가사제대한 청년의 소식에 누구보다(심지어 대적하고 있는 북한군보다) 흥에 겨워 기뻐하는 이들도 바로 진보진영 일각의 지식인들과 언론들이 옹호하는 그 대다수의 넷페미 집단이었다.


  구의역 참사가 터졌을 때도 트위터 너머에서 그들은 참고 있지 않았다. 용감하게 나서서 구의역 노동자 청년의 죽음을 조롱하고 헐뜯으며 자신들의 담론이 성장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다른 남성 노동자 청년을 향해 구의역의 그 희생자를 본받아 너희도 어서 죽어라는 메시지를 퍼부은 건 덤이었다.


  그 무렵 민주노총과 여성민우회 등 진보진영에 얽힌 집단들은 "우리는 반사회적이며, 우리는 메갈리아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이런 패륜아들을 보호해왔다. 이들은 다른 쪽에선 "우리는 부자 남편을 원해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며 자축했다.


  기성 정치권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누구도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를 보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반응에 항의하는 청년남성들은 너네가 왜 이런 극단적인 폭언을 들으면서 반성해야 하는지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10대 청소년들은 '남자가 완전히 박멸되면 얼마나 행복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우화를 강제로 읽으며 본인들이 책임질 수도 없는 과거에 대한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물론 이런 과격한 교육에 상처와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들에게 어른들은 "너희의 고통은 환각통"이라며 냉담하게 반응한다. 아직 자기 삶을 펼치기도 전인 학생들인데.


  남성 청년의 고민을 진지하게 다루어줄 담론은 영영 실종해버렸다. 2016년 양성평등진흥원 조사결과 커뮤니티별 성차별적 게시글 수는 1위를 차지한 그 일베저장소를 뒤이어 네이트판, 워마드, 메갈리아가 2,3,4위를 연달아 차지한다. 한 해동안 남성에 대한 증오표현이 수 천배 증가하기도 했다. 상황은 이렇지만,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서 20대 남성이 강자"라며 이들에게 증오심을 퍼붓는 담론이 제도적으로 옹호받았다.


  그렇게 2021년 4월 재보궐까지 왔다. 70%를 상회하는 극단적인 수치를 보고서야 이들 진보 진영 일각의 운동가들은 겁에 질려 허겁지겁 정체성에 집착하는 자신들의 젠더 담론을 숨기게 된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너무나 늦게도 이제와서야 겨우 오래전 반쯤 잊힌 경제적으로 낙오한 청년들의 연대를 황급히 다시 끄집어 낸다. 그러면서 보수 진영의 경제담론을 압박해 청년남성의 지지를 회복해보려 안간힘을 써본다. 그런 당신들의 모습에서 누가 진심을 찾으랴.


  청년 남성의 선택이 젠더갈등 때문이라는 분석이 얼마 보도되기도 전에 진보언론들은 서둘러 "절대로 페미니즘 잘못이 아니다!"라는 기사를 쏟아 부어 본질을 가리기 위해 애썼다. 이러니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다.


  솔직히 말해 근 몇 주간 크고 작은 진보언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것들, 노동 현장을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청년들을 전혀 대표할 수 없는 정치가 일각의 소수 운동권 남성청년들을 모아 급조된 피케팅 행사를 벌이던 것들, 본인들 스스로 너무 가증스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그들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달리, 요즘 그 어느때보다 페미니즘 관련 요구들이 깨끗할 정도로 지면 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본인이 쏟아낸 변명기사, 논평의 숫자만큼, 사실은 본인들도 무엇이 진짜 원인인지 알고 있는 것이겠지. 예컨대 청년정의당 논평에는 간간히 성소수자 이야기만 보일 뿐 여성정책 관련 논의는 한 달 반 째 통째로 증발해버렸다.


  여러분들은 암담한 노동현실에 청년남성들이 분노했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그 청년들의 고통을 비웃고 깔보던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들이었다.


  폭등한 집값에 청년남성들이 희망을 잃었다 말하겠지만, 누구보다 먼저 고시원살이에 괴로워하는 남성들의 처지를 축하하며 즐거워하던 이들이 바로 여러분들이었다.


  열악한 징병제에 청년남성들이 분노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군캉스라며, 자신은 안 가도 되는데 뭔 상관이냐며 무관심하게 굴고 모욕하던 것들도 바로 여러분들이었다.


  그렇게 확신하면 기존에 하시던거 계속하지 그러나. 산재로 세상을 떠난 남성 노동자의 죽음에 축하댓글을 달아대고, 트위터 상에서 자살한 연예인의 죽음 과정을 비웃고, 군대에서 다친 사람들에게 군캉스에서 놀다보면 그런 일 있을 수 있지 않냐며 모욕을 가하던 것들. 대학가에서 사소한 말실수에 격분해 동아리에서 추방하고 조리돌림하던 짓들.


  그리고 그런 반사회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보호해주던 진보단체들, 언론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좌절이 본인들이 간직한 언어적 규약보다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당신들, 계속하세요 부디. 이제와서 '미러링 놀이는 일단락되고 끝났다'식의 유치한 핑계대지 말고. 그게 아니면 꼭꼭 숨겨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이 겁쟁이들아. 그게 더는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어쩌면 여러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저 보수진영의 기만과 다국적 기업의 탐욕을 향해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을지 몰라.


  2017년인가 기억이 난다. 내가 몸을 담은 단체에서 우리는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으며, 세대를 떠나 젠더를 넘어 상처받은 노동자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여성주의를 모색해보자고 다짐했다. 정의당의 전 청년부대표이기도 했던 분의 목소리도 기억이 난다.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을 구실로 빈곤 가정 출신자들, 성소수자들, 노동자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그 희망없음을 짓밟는 행태가 괴롭다며, 그 모든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본인을 찢어놓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분을 물어 뜯고 압박하고 괴롭히던 인간들이 이제사 이제와서야 그가 과거에 핍박받으면서도 힘겹게 주장하던 것들을 정확히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공정과 평등을 누가 진지하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뒤틀린 인간들, 나쁜 페미니즘을 당당하게 외치다가 정말로 나쁜 사회를 만들어버리곤 겁에 질려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부질없는 열정이란.


  이처럼 분별없고 그릇된 열정이 우리의 진보적 지조에 깊은 손상을 안겼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그간 무비판적으로 그릇된 방식의 운동을 수용한 정치권과 언론권 기성세대는 진지한 자성이 필요하다. 진보진영도 이제는 여전히 극단적인 태도를 탈피하지 못하는 이들과 단호한 결별이 필요하다.


  그 미러링은 그간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쏟아부은 화력에도 불구하고 잔인하리만치 실패했다. 청년 남녀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 안기고, 정확히 그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만 낳았다. 이제와서 이들을 인문학적 말장난, 자기본위적 신어(新語) 만들기로 추켜세우던 지식인들은 더 이상 메갈리아든 미러링이든 하는 단어를 입에 담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기억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눈치다.


  이에 저항을 인정하지 않고 실존하는 갈등양상의 존재를 받아들이길 완강하게 거부하면, 다음 차례는 진짜로 한국형 대안우파의 등장일 것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때도 출구없는 반항을 하게 될 이들에게 지금껏 해온 것처럼 폭언 섞인 방식으로 가르치려 든다면 그건 2차 가해가 될거라고 본다.


  앞으로 우리가 맞이해야 할 다양한 도전들이 있지 않은가. 다문화와 개방, 이민, 지역주의와 같은 문제를 슬기롭게 다루기 위해선 이러한 갈등양상을 정직하게 극복해 나가야 한다. 분별없고 그릇된 분노와 증오심을 떨쳐내자. 진보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을 자성하고, 진보의 지조를 회복하자. 그것이 정말로 힘있는 목소리를 회복하여 앞으로의 도전을 슬기롭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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