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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Jul 12. 2022

불편부당 창간호 독서후기(1)

정신적 폐허 속 조그만 재건시도


* 진보너머 필진 다수가 합류한 <불편부당> 창간호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최근 진행했습니다. 그 중 1위로 당선된 "타우루스(필명)"님의 독서후기를 공유합니다. 

저자는 민주진보 세력은 이미 '이대남 현상'을 보고서로 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전략적인 판단 대신 ‘의도적 트롤링’에 가까운 전략만 채택하였으며, 그렇게 선거에서 필연적으로 3연패를 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힙'함과 '스윗'함을 과시하느라 바쁜 나머지 현 청년 남성들에게 비전 제시는커녕 비아냥으로 일관했으며, 그들의 젠더관 및 세계관이 80, 90년대에 머물러 있음을 자인하며 스스로 청년들의 ‘롤 모델’ 역할을 걷어 차버렸습니다. 심지어 그간의 과오에 대한 반성은커녕 청년들이 ‘보통 일베화’되었다고 비하하며, 자신들의 전략을 수정하기보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불편부당>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한 민주진보 세력의 몰락을 담은 슬픈 '예언서'였다고 평가합니다. 이에 필진들도 무거운 마음으로 독서후기를 읽었습니다.

앞으로는 슬픈 예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갈 수 있길 고대합니다. 공유한 독서후기의 일독을 권하며, 독후감 공모전 2-3위 작품들도 순차적으로 공유하겠습니다.


1) 그들은 알고도 당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명장들은 쓰라린 패배를 겪었지만, 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아니하여 역사에 당당히 명장으로 기록되었다. 그에 비하여 패장으로 남은 이들은 과거의 전략-전술에 매몰된 나머지 도태되어 졸장으로 남아버렸다. 폼페이우스와 항우 역시 각각 고대 로마와 고대 중국을 대표했던 명장들이었지만, 각자 자신들의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그들보다 한 수 아래라 여겨졌던 카이사르와 이름 없던 유방에게 역사에 남을 패배를 하였으며, 패배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이 패배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였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에 비하여, 맞수들과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패배를 분석하고 끊임 없이 전략을 유동적으로 수정한 카이사르와 한 고조 유방은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황제들로서 역사에 당당히 회자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 한국의 민주 진보 정당들은 카이사르와 유방의 길보다, 폼페이우스와 항우가 걸었던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뿐이다.


대선과 지선에서 한국의 민주, 진보정당들은 한국의 대중들에게 완벽한 파산선고를 받았다. 언뜻 대선 결과 통계를 분석하게 될 경우 이재명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받은 총 득표수가 보수 후보보다 많고, 제8회 지방선거에서 한국 인구의 최대 다수가 거주하는 경기도를 사수한 성과를 보면 민주 진보 진영은 선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자유한국당을 ‘TK 자민련’ 수준으로 전락시킨 19대 대통령 선거와 7대 지선과 결과와 대조를 할 경우, 민주 진보진영은 냉정히 말해서 실패하였다. 사수한 인천 계양과 경기도 역시 전통적인 민주 진보 강세지역이었고, 경기도에서 거둔 승리조차 보수 진영의 내분으로 간발의 차이로 이긴 선거였으며, 겨우 궤멸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간 씁쓸한 성적을 받게 되었다. 2017년 20년 집권론을 당당히 외치는게 당연시 되었었다. 180석이라는 민주진보정당 역사상 전례 없는 의석을 얻으며 경상남도 지자체장을 석권하였던 정당은 2022년 10년도 못 채우고 단 5년 만에 정권을 ‘TK 자민련’에게 헌납하고 ‘호남 자민련’으로 전락하였다.


진보 정당인 정의당의 상황은 민주당이 희망의 상징으로 보일 정도로 절망적이다. 2017년 심상정 후보가 200만표 가까이 받으며, 지방선거에서 지역 의회에 당당히 자신들의 전진 기지를 형성한 정의당은 이번 대선에서 80만표만  건져내었을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 8회 지방선거에서는 6명을 당선시키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특히 이 정당이 국회에 6석을 보유한 원내 제3정당인 것을 감안하면 이 정당이 추구한 선거 전략은 실패하였다고 당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과거 양당제가 더 견고한 시절에도 꿋꿋이 유의미한 제3세력으로서 대중들에게 인식된 정의당은 사실상 대중들에게 대안 세력은커녕,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정치동아리화만 면하였을 뿐이었다. 외려, 원내 의석도 없는 진보당보다 더 낮은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2022년에 사는 우리가 2017년으로 시간여행을 가서, 자유한국당이 다시 부활하고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 자한당 후보가 되어 다음 대통령이 된다고 예언하였을 때, 과연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란 생각을 하면, 2022년의 선거 결과의 참사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 ‘기적’ 같은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데 5년이 채 걸리지 않았으며, 민주 진보세력의 든든한 아군이었던 청년 남성층에게 민주 진보 정당은 그저 위선과 오만, 그리고 래디컬 페미니즘에 취해버린 과거 유물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청년과 노동자를 대변하던 정의당의 몰락은 청년과 노동자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탈되는‘대한항공 땅콩 리턴 사태’의 피해자인 박창진씨를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례대표 순번에서 하위 순번으로 배정할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늦가을과 추운 초겨울 거리로 나온 청년의 절반이 보수 정당의 지지층으로 변하는데  5년이란 시간은 충분하였다.  5년이라는 역사적으로 찰나의 시간 동안 이대남, 삼대남, 그리고 미래의 유권자인 ‘일대남’들이 전통적 지지정당이었던 민주당으로부터, 정의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기엔 너무도 충분하고 긴 시간이었다. 가장 비참한 순간은 선거 패배가 아니었을 뿐이다. 민주 진보 정당들은 ‘불편부당’이 창간되기 이전부터 ‘이대남 현상’을 2030남자들 생각 이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2)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괘씸했다.)


불편부당 1호가 창간되기 전부터 이미 한국의 민주 진보 리더들은 이대남 현상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대남, 삼대남’ 집단이 자신들의 청년시절과는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에서 자라온 것을 알고 있었다. 청와대 내부 보고용으로 작성된 ‘2019년 20대 남성지지율 하락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 보고서는 공정성과 개인주의 및 일부 능력주의를 중시하는 이대남의 요구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의 결론 역시 정부·여당 인사들에게는 여성문제 및 성평등 관련 이슈에서 신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민주 진보 정당의 주요 리더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페미니즘이 가지는 모순점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이대남의 72.5%는 오세훈 시장에게 가버리게 되었다.


게임 및 서브 컬처에 대한 규제를 넘어 전 방위적인 ‘성평등 교육자료’를 바탕으로 남자들을 규제하려 했다. 또한 청년 남성들을 설득하기보다, 오히려 ‘일베 사태’ 때 가장 일베 유저들과 최전방에서 댓글을 달며 싸운 그들을 ‘일베충, 혐오 세력’으로 낙인찍으며 계도하려 했다. 심지어 양성평등 위원장이란 사람은 남성 스스로 무고함을 밝혀야 한다는 근대적 무죄추정의 원칙조차 무시하는 발언을 하여 청년 남성들의 표를 열심히 국민의 힘 측으로 넘겨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게 흘러가는데도 민주진보진영 주류 정치인들은 최소한의 비판조차 지양해버린다.


어디 그뿐이었을까? 기억에 남는 사회적 업적조차 없는 96년생 ‘여성’을 청와대 보좌관에 임명하였으며, 또 다른 96년생 여성을 아예 당대표급인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즉 민주 진보 세력은 이미 이대남 현상을 보고서로 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전략적인 판단 대신 ‘의도적 트롤링’에 가까운 전략만 채택하였으며, 그렇게 선거에서 필연적으로 3연패를 하게 되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0.7%의 차이로 패배한 것을 감안하면, 국민의 힘으로 넘어간 이대남, 삼대남표는 뼈아프게 다가와야 했었다.


차라리 청년 남성의 반, 비페미니스트 현상을 몰랐다고 하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될수 있었겠지만(이런 경우 역시 정치인이 민심을 읽지 못한 직무유기를 하였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알면서 당했기 때문에 필자는 유권자로서, 그리고 불편부당을 읽으면서 괘씸함을 느꼈다. 선거 3연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이십대 여성’을 지켰다고 자축하지만, 20-30대는 전통적으로 남녀불문하고 민주 진보 친화적이었다. 전통적 지지자 집단의 절반을 보수정당의 지지층으로 바꾼 민주 진보 페미니스트들은 질책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개혁의 딸’을 새로운 희망마냥 치켜세우며 더 당당하게 나왔다.


대선 기간 당시, 정치에 입문한 윤석열 후보조차 자신의 지지율이 페미니스트 신지예 영입 이후 떨어지는 것을 체감하고 바로 신지예를 해임시켜버리고 지지율을 회복시켰다. 외려 정치 경험(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시민단체)이 풍부한 민주당의 선거대책위원회는 박지현을 대선 막바지 본격적으로 등판시켰다. 윤석열 후보가 수많은 논란을 보여줬지만, 적어도 선거기간 동안 자신의 지지층이 원하는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여, 페이스북 쇼츠 메시지로 자신의 지지율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윤석열 후보의 승리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민주 진보 정당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층과 척을 짐으로서 그들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를 던져버렸을 뿐이다.


대선과 지선이라는 전쟁에서 패배하였으면, 응당히 패배에 대한 냉정한 피드백과 선거 전략을 재수립하면 된다. 이 간단한 행위는 거시적으로는 세계적 싱크탱크 연구소와 작게는 프로축구 하위권 팀과 E-Sports팀도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안하면 적어도 비참한 패배는 면하고 ‘졌지만 잘 싸웠어’란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기성세대에게 불편한 뉴 미디어 매체도 아니고 불편부당이라는 전통적 미디에 매체인 ‘잡지’ 형태의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가 선택한 것은 박지현 비대위원장 체제였고 그렇게 그들은 대선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를 제 손으로 박탈하였다고 생각한다.

  

3) 희화화된 남성의 고민들과 롤 모델의 빈자리


불편부당을 읽고 나서 필자는 그 동안 잊고 살던 남자로서 살면서 힘들었던 점을 다시 상기했다. 살아오면서 남자로서 참아야지란 생각으로 넘어갔던 수 많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뇌의 무의식 영역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진로와 논물 출간 걱정을 수도 없이 했던 기억, 졸업 이후 혼인 문제와 내집 마련에 대한 골치 아프던 고민들이 필자의 뇌를 일깨웠다. 특히 필자는 선천적 지병으로 인하여 군대를 가지 않았으므로 남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미묘한 기류를 느낀 적도 많았으며, 매일 사회에서 혹시나 도태당할까봐 걱정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남성들의 고민은 외려 희화화된다. 남성의 사회적 실패는 곧 ‘찌질함’으로 귀결되고, 남성의 성욕은 규제대상이었다. 게임이나 성인물에 대한 규제에 대한 항의조차 ‘쩨쩨함’으로 취급당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남자가 아닌 한 개인이 유죄추정을 당하지 않을 권리, 한계에 부딪혔음을 인정받을 권리조차 ‘남성’이라는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는 희화화되거나 묵살 당하였다.


기존 사회는 남자들의 취업 고민을 ‘롤 하느라 바쁨’으로 희화화시키었으며, 남성들에 대한 혐오용어들과 성적인 단어들을 최소한의 필터링조차 없는 채로 내뱉는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현 청년 남성들에게 비전 제시는 커녕 비아냥거리며 본인들의 ‘힙’함을 내세우며, 그들의 젠더관 및 세계관이 80, 90년대에 머물러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의 스윗함을 증명하느라 그들 스스로 젊은 남성들의 ‘롤 모델’ 역할을 스스로 걷어 차버렸다.


사회초년생들 남성들의 롤 모델 역할의 빈자리를 조던 피터슨이 채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PC주의로 무장한 육체만 자란 애어른들과 오냐오냐 해주는 너무도 ‘달달하고 스윗한’ 기성세대 남성들이 청년 남성 어젠다를 방치시킬 동안, 조던 피터슨이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비록 조던 피터슨의 주장 일부는 시대착오적이며 슬라예보 지젝한테도 철저하게 논파 당했지만, 그는 삶의 목표를 잃은 채 방황하는 청년 남성들에게 ‘Clean your room’이라는 소소한 삶의 답을 주었다. 과거 가부장제가 붕괴하면서, 사회가 새로운 답을 내놓치 못하고 그저 PC주의에 매몰될 때, 피터슨은 그래도 답을 어떻게든 청년 남성들에게 주려고 임상심리학자 입장에서, 어른의 입장에서 주려 하였다.


피터슨은 한국의 민주진보세력들처럼 청년들을 배우지 못한 일베 하수인으로 낙인찍지도 않았으며, 청년 남성들이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 치는 행위를 저급한 성적 용어로 비아냥대지도 않았다. 현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는 청년 남성들의 표심을 잡기 위하여, 딱히 앞서나가는 청년 아젠다를 제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는 황폐화된 청년남성의 영역에 무혈입성 하였고, PC주의와 여성주의 광풍이 부는 한국의 정치 문화계에 비교적 상식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이대-삼대남이라는 성을 접수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청년 어젠다 생산능력은 보수 정당이 민주 진보진영을 앞지르게 되었다. 특히 10년 전, 이명박 정부 시절 셧다운제로 여성가족부가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 비아냥과 풍자의 대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10년 사이에 꼰대 및 여성주의 이미지가 청년 남성들에게 보수 정당에서 진보정당으로 넘어간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는 현재 민주진보정당이 청년 남성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남성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준석이라는 정치인 한 명이 가지는 임팩트와 어젠다 생산능력이 정의당의 류장강과 민주당의 청년위원회 집단보다 더 대중에게 회자되며, ‘나는 국대다’를 통해 선발된 여당 청년 대변인들이 민주당 청년들보다 더 영향력 있는 게 2022년 대한민국 청년 정치의 지형의 뒤바뀐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외려 시대에 떨어진 이미지는 ‘586’ 이미지의 민주당이 가져갔다. 이준석이 주장하는 능력주의에 일부 비판이 있지만, 그가 새로 국민의 힘에 가입한 당원들에게 공정한 토론을 바탕으로 대변인을 임명하고 지방선거에 PSAT 테스트 등을 도입하여 ‘6070’의 정당인 국민의 힘에 청년 활력을 불어넣을 동안 민주당이 내놓은 패는 박성민과 박지현 그리고 ‘개딸’들이다. 개딸들이 이재명을 아빠라 부르며 동물 마스크를 쓰고 퇴행적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이준석은 겉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과제인 청년 남성과 50대 이상 보수층을 물리적으로 연합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준석은 10년 동안 ‘마삼중’ 소리를 들으며 선거에서 세번이나 낙선하고, 시사방송에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공방전을 치루며 서서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었으며, 당당하게 기성 정치인을 쓰러뜨리며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시작은 박근혜 대통령의 특채였지만, 그는 청년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와 역차별 현상을 대변하여 항상 어젠다 세팅에서 상대보다 앞서 나가면서 한국 최연소 당 대표 기록을 써내려갔다.


안타깝게도 민주당이 내놓은 패는 페미니즘 하나만 가진 96년생을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국가 의전 8위권 비대위원장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준석이 제시한 어젠다를 바꾸기보다 뒤따라가는데 급급하였다. 외려 그녀는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기보다 자신이 이준석에 비견되는 유명세를 가졌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기억에 남는 그녀의 언행이었다.


전략적으로 상대의 전략에 한 발짝 늦게 반응하여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게 패착의 지름길이다. 박지현이 이끄는 민주당은 필연적으로 지방선거에서 화려하게 패배하여 전략의 빈곤을 스스로 증명하게 되었다.


불편부당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주진보세력의 몰락을 담은 슬픈 예언서였다. 본 잡지가 하지 말란 행위를 모조리 해놓고 선거에서 이기길 바란다면 그것은 전략 관점에서 양심이 없는 것이다. 과거 앞서갔던 어젠다 세팅 능력을 회복하지 않고, 페미니즘과 PC주의 원툴로 사회 문화 어젠다를 선점하려는 행위는 스스로 청년남성들에게 자신들을 뽑지 말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준석 대표가 이끈 대선에서 보수정당은 2030 여성들에게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민주진보 진영의 패배에 못을 박아버렸다. 


보수정당이 진보정당보다 이슈(군인 임금, 할당제 논란, 페미니즘)를 선점하여 대응하는 것을 보면, 한 동안 진보정당을 뽑았던 필자는 한때 ‘개혁적 이미지’를 내세웠던 대통령 후보가 퇴행적 개딸 아빠로 전락해버린 현재 상황에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렇게 불편부당은 민주진보세력의 선거 승리를 위한 공략집보다, 사후 예언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4)느꼈던 조그만 희망


그래도 불편부당 1호가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PC주의와 정체성 정치에 대한 강박적인 트라우마 행태로부터 자유로운 좌파세력이 한국 사회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현재 진행형으로 민주당은 180석의 정의당이 되었고 정의당은 현재 나날이 진보 정당에서 정치 동아리로 격하되고 있다. PC주의가 본래 사회의 소수자를 보호하고, 자유로운 사회분위기를 내세웠던 것과 다르게, 사회를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독재정부마냥 검열 사회로 이끌었으며, 사회에 성숙한 어른 대신 몸만 큰 미성숙한 애어른만 양산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서로 생각을 진솔하게 말하기 불편해졌으며, 한 개인의 불편함이 타인의 정치, 사회적 권리보다 우선시 되는 모순적인 사회로 변하였다. 특히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세력인 진보 세력이 보수 세력보다 개인의 권리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규제하는 게 현 한국 사회이다. 기성세대는 반성 대신 청년들이 ‘보통 일베화’되었다고 가벼운 비판으로 넘어가려 하며, 자신들의 전략을 수정하기보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지지 집단인 청년 남성지지를 완전히 상실해도, 나머지 절반인 일부 청년 여성 표를 사수하였다고 자축하고 있지만, 이준석이 보수정당 역대 최대 청년 여성득표마저 가져온 순간부터 그 명분조차 사라졌다.


다행히도 민주진보 측에서도 페미니즘의 광풍이 부는 와중에도 꿋꿋이 PC주의와 래디컬 페미니즘에 논리와 합리성을 바탕으로 반대의 의견을 내주는 잡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의 광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돔과 고모라에 상주할 때,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내주어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이대남, 삼대남 현상 그리고 미래의 유권자인 10대들을 위한 담론을 제시해주고 또 대변해주었다. 특히 주류정당들이 무차별적으로 페미니즘에 찬동하고 그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을 때, 소수의견을 몇 년간 내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이 시대에 여러 사람이 집필하는 것이 여간 쉬운 건 아니라 생각하여 필자는 필진들의 용기에 소소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편으로 그만큼 PC주의의 부조리로 인한 남성들의 분노와 허탈감이 드디어 수위권 단계에 도달한 것일 수 있으며, 조만간 앞으로 갈등은 더 심해질 것으로 여겨져 필자의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기도 하였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국의 올드 스쿨 갱스터 랩 그룹인 NWA는 80년대 소외된 미국 흑인들의 하류 삶을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Straight Outta Compton’을 미국사회에 내놓으면서 수많은 흑인 청년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현 페미니즘과 똑같이 당시 미국 주류 문화계는 그들의 앨범을 그저 폭력과 욕설로 범벅된, 예술이라 부를 수 없는 앨범으로 취급하고 금지하였지만, 그들의 앨범은 당대의 히트를 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거리낌 없어지는 후대 힙합의 패러다임을 바꾼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필자도 이번 불편부당 창간호와 2호가 한국의 ‘Straight Outta Compton’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하지만, 흑인들의 근본적 삶을 바꾸지 못한 이 앨범과 다르게, 이 잡지가 한국 사회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꾸고, 멀게는 진보세력의 어젠다 세팅 능력을 다시 회복하고, 퇴행적으로 쇠퇴하는 현 진보세력을 다시 합리적으로 부활시키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필자는 2014년 투표권이 생긴 이래 진보정당에 표를 주었지만, 이번 대선과 지선에서는 그러지 못하였다. 진보가 페미니즘과 PC주의로부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날을 고대하여, 필자도 당당하게 지지하던 정당에 한 표를 행사하는 소박한 희망을 꿈꾸며 독후감을 마치도록 하겠다. 

    

*후일담


불편부당의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에게 가장 ‘가슴’으로 읽히던 글은 바로 성균관대학교 총여학생회 폐지 시위에 대한 글이었다. 특히 필자는 그 시기 교환학생을 마치고 오랜만에 복학을 하던 때였다. 필자는 본래 찬/반 사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항의 경우, 합리적 토론을 나누며 서로 본래 생각을 나누면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되리라 믿었지만, 이번 사안에서는 오히려 본심을 꺼낼 경우 나에게 다가올 불이익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총여 폐지를 함부로 주장했다가 ‘일베충’으로 매도 될까봐, 반대로 총여학생회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의견을 말하면 ‘메갈리아, 남페미’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총여학생회 폐지 투표에서 필자가 느꼈던 가장 슬픈 비극은 총여학생회 측에서 한 여론전보다, 앞으로 지식의 전당인 대학에서조차 자유로운 토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상대방에 대한 섬멸전과 총력전이 자리잡은 것이었다. 대학이란 울타리 아래 서로 이해하기보다 페미니즘 아래 대학이 둘로 갈라져 버린 내전상태가, 합리적인 토론보다 총력전과 섬멸전으로 귀결된 것이 총여학생회 사태가 남긴 상처라 생각한다. 스스로 타인과 대화할 때 셀프 검열을 하게 되는 현상, 그 스스로 검열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저 비탄이었으며, 그렇게 새로운 ‘가면’을 써야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연세대학교 학생 일부가 청소노동자를 고소했단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4년전 성균관대학교 총여학생회 폐지 사태가 남긴 불편하고 미성숙한 어른들의 행태가 반대 진영에서 반복되는 것을 보면, PC주의자들이 내세운 미러링 전략, 개인의 불편함이 한 개인의 생존권과 천부적인 권리보다 앞서는 이 행태를 보면 PC주의자들의 전략은 이상한 형태로 성공하였다. 이제 우리 사회는 PC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반대와 담론을 넘어, PC주의가 사회에 남긴 쓰라린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고민해야하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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