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회성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성을 가진 다른 동물인 개미와 벌 등과 달리 인간은 맹목적으로 사회성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자유의지라는 또 다른 본성을 가졌기에 인간은 사회성의 본성을 거슬러 스스로 사회로부터 떨어져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사회를 이루어 살아온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성을 무리를 이루어 협력하는 성향과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의 사회성은 여기에 더하여 무리를 이루는 개인들이 자신이 삶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리의 다른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더해져야 한다. 인간 종이 적자생존의 투쟁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여정에서 사회성은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무리가 자신에게 제공하는 편익에 대해 의심하거나 사회를 떠나 홀로 살겠다고 결심하거나 자기 무리를 배신하고 다른 무리에 가담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회나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충성해야 할 명분과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와 효용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유지가 어렵다.
신화, 종교, 역사, 이데올로기 같은 가공의 이야기들은 사회 유지에 필요한 명분을 제공하여 왔고, 어떤 공동체든지 음식, 의복, 집과 같이 구성원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공급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무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함으로써 가치와 효용을 입증하고자 노력해 왔다.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사회는 명분과 효용 측면에서 나름 성공한 사회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 사회는 굶주림과 추위, 포식자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일차적인 생존 욕구뿐만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는 무관한 각종 유희와 쾌락, 호기심 충족이라는 사치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인간은 아직까지는 사회성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 인간이 사회성의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단순한 필요조차도 사회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 더구나 현대인들은 사회를 떠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풍요와 문명의 이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인간은 계속 사회를 이루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사회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선,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희미해지고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인간관 계조 차 돈으로 매개되는 사회가 되어 굳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유지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상책이다. 내게 이득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와 소통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들은 거의 전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그 살아가는 방식이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로부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그 사회의 규범에 맞춰 살게 된다. 이러한 지식과 기술과 규범의 총체가 문화다. 문화는 한마디로 그 사회의 생존역량을 좌우하며, 개인의 생존역량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문화가 가진 생존역량과 비례할 뿐이다. 누군가 기존의 지식과 기술에 더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획득하면 다른 사람이 모방(학습)하면서 문화에 변화가 일어난다. 도킨스는 문화가 형성되고 전달되는 방식에도 변화를 동반한 계승 원리가 적용되며 이것이 인간 진화의 또 다른 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문화적 진화에서도 생물학적 진화에서처럼 형질 계승을 담당하는 복제자가 있다면서 이를 밈이라고 명명하였다.
인간의 특징과 능력의 일부는 순전히 유전에 의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고 일부는 순전히 학습에 의해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생물학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의 결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다양한 소리를 내거나 구분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과, 소리를 기호로 삼아 어휘를 만들고 그들의 결합 규칙인 문법을 만들어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결합하여 우리의 언어 능력을 구성한다. 인간의 사회성도 언어처럼 생물학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이 결합되어 구성되는 능력이라 봐야 할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가 유전자 변이에 의해 촉발되듯 문화적 진화도 밈의 변이에 의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성에 심각한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 그 변이 추이에 따라 어떤 문화는 도태하고 어떤 문화는 살아남을 수 있다. 나아가 인류 자체의 지속가능성마저 도전을 받고 있다. 유구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종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와 달리,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전 세계로 퍼져 인류 전체의 삶의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밈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변이이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사회성 위기의 본질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사회성에서 인식하고, 관계 맺고, 소통해야 할 대상이 ‘동료 인간‘에서 점차 ‘돈’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반면, 우리의 생존과 욕구 해결을 위하여 우리가 사회에 의존하는 정도는 훨씬 커지고 있는 모순이 문제다. 이러한 모순은 혐오와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냉전이 끝나고 EU가 출범하던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지구 상의 많은 나라들이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해 세계 정부 구성에 합의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박애주의와 형제애의 이상을 견인해왔던 주요 국가들마저 자국의 통합과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안간힘을 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과거 어떤 사회에서나 분열은 존재했다. 작은 무리들이 더 큰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몇 세대를 거쳐 피가 섞이고 문화가 섞이기 전까지는 과거의 적대적 감정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를 이루고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출신 부족보다는 신념이나 이해관계가 분열의 기준이 되었지만, 한 사회에서 분열상은 비교적 단순한 모습이었다. 계급, 민족, 종교, 성 등, 어느 하나의 대표적인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나면, 다른 차이는 무시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는 전 인류를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계급으로 나눌 뿐이며, 국적, 민족, 종교, 성 등 나머지 모든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를 단결시키고 세계주의를 꿈꿀 수 있었다. 그 반대 진영의 논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계급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자본의 이동을 막는 모든 규제는 철폐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전 세계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관점의 세계주의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사소한 차이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 같다. 미국의 노동자와 중국의 노동자가 경쟁하고, 같은 미국 안에서 백인 노동자, 히스패닉 노동자, 유색인 노동자가 경쟁하며, 같은 백인 노동자 그룹도 보수와 진보, 여성과 남성, 지역 구분에 따라 나누어져 대립한다. 정체성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끼리만 소통하고 무리를 이루어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대립하는 듯한 모습은 폐쇄적 사회성이라 부를 만하다.
폐쇄적 사회성은 같은 집단의 구성원을 끊임없이 가상의 적으로 규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고, 공동체의 단합을 위한 의식에 참여하는 등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방인이나 낯선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적이기 때문에 처음 직접 대면하는 순간은 극도로 긴장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에게 위해를 가할 의사가 없고, 나와 말이 잘 통하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를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음이 드러나면서 긴장이 풀리고 그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는다.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상대를 알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직접 소통하지 않더라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무리에 속한다고 확인해 주는 것도 이와 유사한 효과를 일으킨다.
오늘날 폐쇄적 사회성이 강해지는 원인은 인간관계와 소통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돈에 의해 매개되고 통신 수단을 거쳐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통신기술을 이용함으로써 인류는 물리적, 지리적 한계를 넘어 지구적 규모의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고 더 높은 문명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니 현재의 변화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폐쇄적 사회성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몸매로 살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먹는 것을 거부하여 죽음에 이르는 거식증 환자처럼, 폐쇄적 사회성을 가진 개인들은 더 이상 사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사회를 파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체성과 자기 이익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에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 날씬한 몸매에 대한 열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듯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과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좇는 성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다른 정체성과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증오하고 적대하는 태도가 지나친 것이 문제다. 사회가 일종의 ‘거식증‘을 앓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폐쇄적 사회성의 문제를 극복하고 ‘거식증 사회‘를 치유할 수 있을까?
관계와 소통이 매개적 방식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 찬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을 구원해 줄 방법은 무엇인가?
-> Part. 2 에서 계속 https://brunch.co.kr/@kosac/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