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업이 이제는 혁신 없이 생존이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하면 혁신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뾰족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기업을 둘러싼 환경, 즉 시장, 제도, 기술 등 모든 것이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혁신은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혁신은 조직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조직문화는 그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신념 체계와 행동 양식의 총체다. 조직문화의 변화란 구성원들의 신념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 사람의 신념과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수많은 사람들의 신념과 습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디지털 혁신(Digital Innovation) 또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술이 조직문화의 변화를 수반한 혁신을 가능케 하는 만병통치약(cure-all)이라고 믿는 듯하다. 디지털 혁신의 의미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맥락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요컨대 디지털 기술을 조직 운영의 전반에 이용하여 혁신을 달성하겠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혁신이 업무 전반에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고, 모든 사물에 센서와 무선 통신 기술을 탑재하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대량의 데이터를 실시간적으로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생산성을 극대화하거나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조직문화를 탈바꿈하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마디로 디지털 혁신의 목표가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디지털 혁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조직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디지털 혁신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디지털 혁신은 커뮤니케이션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조직 내부 구성원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조직 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혁신하는 것이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커뮤니케이션의 규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모두 포함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계층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와 명령의 수직적 이동이 주를 이룬다. 모든 정보는 아래에서 위로 모이고, 조직의 최상층은 이렇게 모인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그 결과가 다시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되어 분배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의 문제점은 수없이 많이 지적되어 왔으며, 각종 경영혁신 프로그램들은 기존의 기업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수평적이고 분권화된 형태의 조직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 결과 많은 기업들이 의사소통의 단계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특정 업무 영역에 특화된 전문가들로 구성된 부서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최소한의 계층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단계가 아무리 많이 생략되고 줄었다 하더라도 정보와 명령의 전달이라는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 혁신은 바로 그러한 조직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 공유에 머물지 않고 공동의 관심과 목표를 이끌어내는 커뮤니케이션, 소수에 의한 의사결정을 명령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자 전원의 참여와 합의에 의해 공동으로 의사 결정하는 방식의 커뮤니케이션.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이처럼 바뀌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인터넷과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공감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진 밀레니얼 세대 인재들로 조직이 채워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합의 커뮤니케이션으로의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대해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면 그들은 아무리 대의명분이 크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일방적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조직문화를 바꾸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모두가 동의했다고 해서,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자연스럽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 권위적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 수동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 직장생활은 단지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가정과 여가시간과 친교가 더욱 중요한 사람들에게 솔직한 의견을 제시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토론에 참여하고 조직의 혁신을 위한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한다고 하여 그들의 오랜 습관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솔직한 의견 제시로 인해 손해 볼 수 있다는 두려움, 평판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 상사나 동료에 대한 불신, 공동 결정을 조직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있는 상태에서 구성원들의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조직의 구성원들의 태도와 습관이 바뀌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자리 잡고 결과적으로 혁신형 조직문화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
첫째, 익명성을 보장함으로써 솔직함을 이끌어 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이 틀리면 어떡하나 또는 솔직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불이익을 당하거나 평판이 깎일 것을 걱정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익명성은 또한 특정 인물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 사람의 의견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둘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소중한 권리를 남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발언권은 창의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건설적인 비판과 피드백을 주기 위한 것이다. 소중한 발언권을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거짓 주장에 할애할 수 없도록 발언권은 희소자원으로 여겨져야 한다.
셋째, 모두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해야 한다. 발언권이 동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최종 판단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넷째,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내려진 의사결정은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리 파악하지 못한 추가적인 정보에 의해 잘못된 의사결정이라는 점이 밝혀지거나 가용한 자원의 한계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 채택되어 실행되어야 한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효능감을 갖게 되어 심리적 보상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이러한 합의 커뮤니케이션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내적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다섯째, 필요하다면 물질적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특정 의사결정 사안에 대해서 그 결정의 가장 직접적이고 혜택을 누리게 될 사람은 자신이 얻게 될 혜택의 일부를 해당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물질적 보상은 합의 커뮤니케이션의 외적 동기부여가 된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성은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는 기업들은 왜 유독 실리콘밸리에 모여 있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실리콘밸리 지역과 그 외 지역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미국 내에서도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유난히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 또한 자유분방하고 솔직하다. 관습이나 관행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보다는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태도,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성이 충분히 발현될 수 있는 환경, 다른 사람의 의견과 행동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와 능동적 행동을 기대하는 풍토가 혁신을 위한 조건이다.
성공적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처럼 디지털 혁신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실리콘밸리로 이전하거나,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현재 조직에 이식하거나, 그곳 사람들을 대거 영입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면, 위에서 제시한 방법에 따라 조직의 커뮤니케이션을 혁신하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