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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Mar 21. 2022

과거는 잊어주세요

'마음'이라는 박스가 있다면 채울 수 있는 용량의 한도는 어느 정도일까. 아무래도 묵직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 있으면 더는 새 물건을 채우기가 힘들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마음이란 상자에 담아둔 묵직한 짐들을 담아두고 있었다. 그 짐들은 평소에는 잘 보이지를 않다가,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나 여기 있어요, 잊지 말아요."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이 짐들은 주로 과거의 기억에서 파생한 감정들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 반복한 실수, 나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 이 감정들은 새로운 일이나 관계를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내 발목을 잡았다. "너 예전에 이런 실수했잖아. 변했을 것 같아? 똑같아. 그냥 하지 마", "지금 잘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 속으로는 너 욕하고 있을 걸. 그냥 안 만나는 게 속편해", "너는 늘 부족해. 변하는 게 없을 거야." 


얼마 전 사소한 일에서 시작해 과거의 경험들을 다시 꺼내든 내게 남편은 일침을 날렸다. 


과거는 좀 잊어. 그거 뭐 좋은 거라고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어? 너한테만 더 안 좋아. 그냥 털어버리고 좋은 거 생각하고 살아. 



예전 같았으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항변했을 내가 갑자기 머리에 번개가 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과거의 해묵은 감정들, 나를 갉아먹는 상처들, 왜 아직까지 싸매고 가지고 있을까. 내가 버리면 되는 건데, 뭘 그렇게 좋다고 싸안고 사는 걸까... 이제는 버려야겠다. 


마음 먹기의 차이였다. 나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던 해묵은 감정들은 내가 마음 먹는 순간 순식간에 나에게서 떨어졌다. 이 감정들을 가지고 사는 게 최소한의 복수고, 기억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만 과거속에 발목 잡혀 살고 있었다.   


해묵은 감정들을 버리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던 마음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상처 받더라도 다시 사랑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다를 수 있고, 한 번 상처 받은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 거라고 다독이기로 했다.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에 공감되는 대사가 나왔다. 



나는 아직 13살에 머물러 있어 엄마. 속보 때문에 아빠 장례식에 오지 않은 엄마를 잊을 수가 없어서. 그게 도저히 용서가 안 돼서. 난 아직 13살에 살고 있어.



강렬한 사건은 때론 시간을 멈추게 만든다. 나이가 들고 몸은 자라지만 우리의 기억은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자라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그걸 털고 가야 우리의 기억은 자랄 수 있다. 강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지만 우리 마음은 얼마나 여리고 상처 받기 쉬운지.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 영향을 미친다. 상처 받은 마음은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방어적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과거에도 부족했으니 지금도 그럴 거라는 자신감 없는 태도는 성장 없는 삶을 만든다. 더 이상 내 아까운 삶을 지나간 감정에 자리를 내주기로 않기로 하니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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