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ing a Bridge
“삶에 있어서 수시로 부닥치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문제는 항상 '이 다리를 건널까, 말까'이다. The hardest thing in life is to know which bridge to cross and which to burn."
- David Russel
경계를 넘는 것은 선택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Caesar)나 최초로 영국 해협을 비행 횡단한 루이 블레리오(Louis Blériot), 그리고 시공간의 경계를 넘은 엘리(Ellie, 영화 Contact 1997)는 무한의 상상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공포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계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존 열대 우림의 원주민 부족은 반경 1km 이내의 생태계 내에서 일생을 마친다. 인터넷 이전 시대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우리 세대는 대개 고향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서울은 올라가야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장소의 경계 너머에는 검은 숲처럼 미지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그런 시절이 불과 몇십 년 전에 엄연히 존재했다. 그 옛날 전염병은 마을에 풍문으로 먼저 도달했고 실제로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전에 공포가 일상을 질식시켰다. 로마 군단이 루비콘강을 건너면 무장을 해제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 시절 전쟁은 머나먼 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었고 참혹한 전쟁의 실상은 눈에서 불을 뿜는 영웅의 무용담으로 윤색되어 전해졌다. 1차 세계대전 독일의 고타(Gotha G Ⅳ) 폭격기가 런던 시민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트리기 전까지 전쟁은 멀리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참혹한 전쟁의 눈 앞에 펼쳐지면서 일반 시민들은 매트릭스에서 깨어난 니오처럼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오히려 폭격기의 내부는 가상현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폭격기의 승무원에게 전쟁은 비현실적인 이미지처럼 펼쳐지는 게임과 같은 것이 된 것이다. 현대전의 총아인 드론의 조종사들은 게임룸 같은 조종실로 출근해서 수천 킬로미터 밖의 작전지역에서 사람을 죽이고 정시에 퇴근한다. 이제 거리에서 택시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한 많은 일상의 행위는 스마트 폰의 화면 속으로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전자적 신호로 바뀐다.
<그림 1> 1차 세계대전 독일의 고타(Gotha G Ⅳ) 폭격기가 런던 시민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트리기 전까지 전쟁은 멀리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어느 순간 예견하지 못한 사건에 의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계를 넘는다. 평범한 사람은 그 '넘어섬'의 의미를 잘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누군가는 도태되고 누군가는 번영하였지만, 대부분은 양순한 변종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진행형인 팬데믹으로,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리를 건넜고, 다시는 다리 저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사태가 너무 길었고, 모두가 다리 이편의 세상을 모두 알아버렸다. 일과 일상, 교육, 경제,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여파를 아직 제대로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그 여파를 가늠하기에는 지력이 모자라고 가늠하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굉장히 다른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들을 경험하면서 이제 이 세상에는 두 개의 달이 뜨고 고양이가 말을 걸어와도, 혹은 벽장 속에 거대한 초원이 펼쳐져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두 개의 달을 못 견뎌 하면 돌아갈 다리를 찾아봐야겠지만, 적어도 이전의 그 다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림 2> 블레리오 XI.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Caesar)나 최초로 영국 해협을 비행 횡단한 루이 블레리오(Louis Bleriot), 그리고 시공간의 경계를 넘은 앨리(Ellie, 영화 Contact 1997)는 무한의 상상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1992~93년에 걸쳐 빌 미첼(Bill Mitchell) 교수가 주도한 가상 설계 스튜디오(Virtual Design Studio)에 참여했었다. 미국 캐나다 홍콩의 5개 대학이 참여했고 인터넷을 매개로 한 원격 건축설계 협업과 크리틱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로 기억된다. 웹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가 막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여서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대륙 간 프레젠테이션에 모두 흥분했지만, 인터넷은 아직 황무지 같아서 기술적 장애가 속출했다. Telnet, Talk, FTP와 같은 기존의 생경한 명령어 기반 통신을 병행해야 했고, 심지어 마지막엔 국제전화까지 동원했던 기억이 난다.
1994년에서 1995년으로 넘어가는 무렵, 하버드 대학 GSD(Graduate School of Design의 웹사이트 개설 여부를 논의하는 특별 위원회 앞에서 개인 웹사이트 시연을 한 적이 있다. 라파엘 모네오(Raphael Moneo) 교수를 포함한 GSD의 주요 인사들이 "외부에서 이렇게 마음대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건가?"라며 우려와 냉소를 담아 질문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이듬해쯤부터 모든 자료가 웹(World Wide Web)으로 이식되기 시작했다.
팬데믹 동안 지난 수십 년간 더디게, 그리고 강한 저항에 부딪혔던 많은 변화의 요구들이 우리 사회에 무혈 입성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달라져 있을 낯설지 않은 낯선 일상에 우리는 이미 동화되어있다. 미네뜨 바리(Minnette Vári)의 비디오그래프 연작, 센티넬(Sentinel)은 그러한 변화를 맞닥트렸지만, 변화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를 암시하고 있다. 이미지 속의 주인공은 도시풍경을 바라보는 낯선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은 인류와의 연계성을 암시하지만 변형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잔재와 염원, 선물과 무기들로 점철된 것들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변화를 가져다줄 모종의 힘이 덮치기 전 이방 종족의 도시를 정찰하는 첨병(sentinel)처럼, 그것이 아니라면, 어느새 낯설어진 도시로부터 이탈된 정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낯섦이 이미 자신에게 체화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림 3> 미네뜨 바리(Minnette Vári)의 비디오그래프 연작, 센티넬(Sentinel)의 주인공은 도시풍경을 바라보는 낯선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은 인류와의 연계성을 암시하지만 변형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잔재와 염원, 선물과 무기들로 점철된 것들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변화를 가져다줄 모종의 힘이 덮치기 전 이방 종족의 도시를 정찰하는 첨병(sentinel)처럼, 그것이 아니라면, 어느새 낯설어진 도시로부터 이탈된 정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은 그동안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을 중심으로 한 정보통신 혁명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도시로 인용되어왔으며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피부로 느낀다. 전철 안이든 클래식 콘서트홀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연결의 고리, 모든 사람은 이 연결고리를 통해서 그가 지금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있든, 모종의 정보 자원과 연결되어 있다. 전음술(轉音術), 복화술(腹話術), 둔갑술(遁甲術)과 천리안(千里眼)은 신체기능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은 집단기억을 가진 공생동물(共生動物)처럼 순간순간 의식을 주고받고 공유하며 일체화하는 속성을 가진다. 우리의 신체는 이미 이러한 초능력을 위해 언제든지 변형될 준비가 되어있다. 어딘가로 이동 중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쇼핑, 게임, 스트리밍 음원과 유튜브를 즐긴다. 눈과 귀는 주위와의 교감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신 대화를 즐기지만, 옆 사람과는 무관한 어딘가 다른 공간의 누구와의 대화이다. 그들의 배낭이, 바지 주머니가, 손목시계가, 귓속의 앙증맞은 이어폰이 그러한 수단을 휴대하기 위하여 진화하고 있지만, 조만간 그 수단들이 신체 일부처럼 이식되리라는 것은 굳이 미래학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자신 있게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조만간 치과 병원은 이동통신 서비스 가입 처리도 해줄 것이다. 지금의 LTE 모듈은 어금니에 임플란트 될 것이다. 남자 아이들이 포경수술 여부를 선택하는 것처럼 신체에 임플란트 된 사이버스페이스 연결 서비스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불멍 중에 실낙원의 구절을 읊조리며 정보의 바다에서 교양을 뽐낼 것이고, 어떤 이는 수시로 사이버스페이스의 전사가 되어 게임에 몰입할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새 변형된 도시는, 그리고 변형된 우리는, 서로에게 지금과는 대단히 낯선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림 4> 영화 Avatar 집단기억을 가진 공생동물(共生動物)처럼 순간순간 의식을 주고받고 공유하며 일체화하는 속성을 가진다. 우리의 신체는 이미 이러한 초능력을 위해 언제든지 변형될 준비가 되어있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건축 및 사이버 공간이라는 개념은 컴퓨터 모델 또는 컴퓨터 그래픽스(CG) 이미지, 가상현실(VR) 모델, 대화형 건축(Interactive Architecture) 등으로 설명되어왔으며, 유수의 건축사에서 지적하듯이 본질적인 주거 양식의 변화보다는 상당 부분 시각적 스타일로서 자리 잡았다. 각각의 뉘앙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건축의 대지는 물리적 환경이 아닌 컴퓨터 스크린 속이었으며, 사이버 공간은 전자적 공간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건축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는 3D 프린팅이나 사물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언제든지 실제 건축으로 물질화될 수 있는 청사진이며 비용의 증가 없이 무한한 변형이 가능한 건축지식의 기록장치, 즉 다품종 대량생산(Mass Customization)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디지털 건축은 비로소 무한 가공이 가능한 건축(Process-able Architecture)이라는 디지털의 본질을 획득한다. 건축은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가상공간으로 확장되고 MZ세대로 지칭되는 신인류는 이미 가상과 실제 공간의 경계를 구별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실체조차도 대지에서 솟아오른 바닥이나 사람의 손을 거친 인공물이 아니라 그 원형과 조작과정이 디지털 정보에 의해 인코딩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우리의 DNA가 정보의 바다를 떠돌던 조각이었듯 사물의 존재와 과정이 디지털 정보로 환원되는 현실에서 점점 실체와 이미지의 구분은 덧없어 보인다.
<그림 5> Heath Robinson은 사물 네트워크(IoT)의 아버지로 지칭된다. 그의 전기-기계적 세계의 상상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처럼 기발하면서 친근한, 그리고 역설적으로 미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러한 기술이 미래 건축이나 나아가 도시를 어떻게 바꿀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 자신의 소망을 투영하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기술자들이 스마트 도시를 제대로 그릴 수 없는 이유는 삶의 이야기와 질척한 과정이 탈색된 중립적 공간에 일방적으로 첨단 기술들을 중첩하기 때문이다. 사물 네트워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히스 로빈슨(Heath Robinson)의 전기-기계적 세계의 상상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처럼 기발하면서 친근한, 그리고 역설적으로 미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무선 기술이 부재한 당시의 이런 이미지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현실의 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기술을 용매로 삶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방법은 IT가 아닌 예술적 상상력에 존재한다.
3D 프린팅이 형태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라면 다양한 센서 및 액추에이터(Actuator) 기술, 통신 기술, 디스플레이 및 조명 기술은 건축 경험의 새로운 양상을 제공한다.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된 디지털 디스플레이, 즉 LED는 건물의 외피에 능동적인 이미지 정보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제어할 수 있게 한다. 만능 디스플레이(Everywhere-Display) 기술은 제한적이지만 건축물의 어느 부분이든 표정을 부여함과 동시에 사용자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OLED나 매직 글라스와 같은 스마트 재료의 가격이 벽지나 일반 유리와 같은 수준으로 양산되면서, 공간의 경계면은 다용도의 조명과 정보 디스플레이, 그리고 대화형 인터페이스로 바뀔 것이다. 건축의 표면은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마법의 벽처럼 다른 세계로 통하는 출입문이 되는 것이다. 무선 혁명에 의한 건축 소재와 부품은 쉽사리 기존 건축물에도 맞춤형 환경을 도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환경에서, 많은 건축가의 역할은 편재한 기술을 물리적 환경에 결합하는 시스템 통합자(System Integrator)로서의 그것에 무게를 둘 것이다.
<그림 6>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한 많은 일상의 행위는 이제는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한 많은 일상의 행위는 이제는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 나가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부르려는 사람은 대개 자력으로 정상적인 삶이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이다. 건축의 공간 프로그램에서 물리적 공간의 압축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필수적인 공간 요소들이 어느새 장식처럼 덧없어진다. 인공지능과 공간 콘텐츠 관리 시스템(Content Management System. CMS)이 결합하면 현재의 물리적 공간 수요는 극적으로 압축될 수 있다. 스마트 재료와 센서 네트워크, 그리고 사물 네트워크(IoT) 기술의 발전 덕분에 뮤지컬 무대처럼 같은 공간을 무한히 다른 기능의 공간으로 변용할 수 있고 하나의 공간은 유휴 시간 없이 100% 가동될 수 있다. 리니어모터 엘리베이터나 자율주행차, 드론의 도입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건물의 형태, 건물을 경험하는 방식, 사는 방식을 극적으로 바꿔놓는다. 로프식 엘리베이터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천루의 모양은 이제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대부분의 업무 기능과 사회기능이 가상공간으로 이식된다.
<그림 7> 리니어모터 엘리베이터나 자율주행차, 드론의 도입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건물의 형태, 건물을 경험하는 방식, 사는 방식을 극적으로 바꿔놓는다.
우리는 이미 대부분 업무를 무한히 증식된 가상공간에서 수행한다. 업무 지식은 컴퓨터로 입출력되고 클라우드에 존재한다. 얼마나 다양한 지식을 소셜미디어나 단톡방, 혹은 유튜브의 세상에서 얻는지 가늠해보자. 쇼핑과 금융거래, 식사 한 끼 한 끼가 구체적인 시공간과는 무관한 가상의 공간에서 이뤄진다. 오래전 이동통신망의 일시적인 마비로 업무는 물론 자기 집에 전화조차 걸지 못했던 난감한 상황을 기억해보자. 이제 데이터 센터의 화재는 일순간에 이러한 도시를 재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버린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가상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면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알게 모르게 우리 디지털 육신은 시분할(時分割) 되고 적분(積分) 되어 다양한 공간에 동시 존재한다(omni-present). 우리 의식의 파편들은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데이터 세계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활약하고 있다. 수시로 내가 남기는 디지털 흔적은 재가공되고 배양되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데이터 착취의 대상이 되며 재화를 창조하는 유사 생명체로 활동을 이어간다. 새로운 세대는 메타버스 속에서 살고 죽는다. 물리 세계의 의상이나 아이템 못지않게 가상 세계의 아이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굴지의 다국적 기업들은 이미 신발이며 의상이며 가상 세계를 위한 제품들을 앞다투어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갈 건축 공간은 가상과 물리의 경계가 없어지는 혼성적 조직(Hybrid World)이 될 것이다.
메타버스 세계에서는 누구나 건축가가 될 수 있고, 제품을 만들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어떤 쓰레기도 건축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풍경에서 건축가의 사명과 능력은 특별한 것이며, 그것을 인지하는 건축가도 드물지만, 마음 아파하는 건축가는 더욱 드물고, 현실 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건축가는 더더욱 드물다. 왜냐하면 경계를 넘는 것은 항상 뼈아픈 고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리적 공간이 어떻게 좀 더 개인의 소중한 추억을 소환하고,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며, 의미를 불러일으키고, 우연한 발견을 유도할 것인지 고민할 사람은 결국 건축가이다. 건축의 존재 이유가 삶의 세계를 공간에 구현하고 우리를 그 공간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오늘날 건축가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
가상공간이 물리적 공간과 융합되어 시나브로 우리의 유력한 일상이 되는 시점에서 건축가는 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관통하는 특별한 전문가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 시스템은 건축가와 사용자, 물리와 가상, 기술과 철학, 플랫폼과 도구가 상호협력하여 확장하는 혼성적 시스템(Hybrid System)이 될 것이다. 건축가는 혼성적 시스템의 '아키텍트(Architect)'로 변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를 넘었다.